말씀/조원형목사님

151129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아나로그. 2015. 11. 30. 23:56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151129                                                                                               조원형목사님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세기 21:1~7)

 

옛날 중국 초나라 장왕이 이웃 월나라를 침공코자 한다.

다른 신하들은 어떤 말로도 간언치 못하는데 두자가 간언한다. 침공 연유는 무엇입니까. 이에 월나라가 정치 혼란에 빠지고 병력도 약하니 이에 정복코자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 눈은 멀리 있는 것은 보지만 가까이 있는 눈썹은 보지 못합니다, 다른 나라의 정황을 듣고 정복하려 하지만 그 나라보다도 우리가 못합니다. 정치와 병력도 약하고 반란군조차 모두 제압치 못해 승산이 없습니다 말하니 결국 깨닫고 계획을 취소한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손자병법이 전쟁에서만 인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다.

 

자연과 사회를 잘 아는 학박사조차도 옛날보다도 자신을 모르는 현대를 산다.

자기 위치에서 자신을 알아야 하는데 자만 교만 아집이 대단하다. 집안의 부부, 가족간 문제가 심각하다. 자기를 모르니까 상대의 헛점, 심각성에 대해서는 잘아니까 자신은 완벽한 줄 안다. 자연 우주 과학의 신비성은 잘 알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허물투성이, 무지막지한 죄인임은 모른다.

도대체 나는 어느 정도의 사람인가.

세상 사람과는 달리 산다고 생각하는 분들조차 깨닫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북유럽 교회의 전설이다.

사람 크기만한 예수님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상이다. 예수님 상앞에서 기도하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 천주교회의 전설이다.

교회 문지기 한분이 산다. 예수님 상앞에서는 모두가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절도 하고 존경스럽게 예수님상이 보이는데 문지기 자신은 초라하게 느껴진다. 예수님 상이 부럽다. 자리를 바꾸어 봤으면 좋겠다 한다. 아무도 없을 때 예수님 상이 걸어와서 자리를 바꾸어보자 하신다.누가 와서 무슨 기도, 무슨 일을 하든지 말을 하면 안된다는 조건이다. 자리를 바꾸었는데 사람들이 경배하고 인사하는데 우쭐해진다. 그런데 사람들이 찾아와서 기도하는 내용이 들린다. 기도를 잘 한다는 생각도 하는데 되지 못한 기도도 듣는다.

한 부자가 와서 자기 일이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들고온 돈가방을 잊고 놓고 간다. 그 다음에 가난한 사람이 와서 기도후에 돈가방을 보며 소원 성취에 감사한다. 그 다음에 한 청년이 와서 기도하기를 먼나라에 항해를 나가는데 무사하기를 기도한다. 이후에 먼저 나간 부자가 돈가방이 기억나서 찾으러 오니 청년이 보이기에 청년 멱살을 쥔다. 침묵을 지키던 문지기가 모든 광경을 보고는 너무도 답답하여 말을 한다. 부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부자가 뛰어나가서 가난한 이를 찾는데 청년은 시간이 촉박하여 겨우 배를 탄다.

예수님이 다시 찾아와서 문지기를 책망한다. 왜 말을 했느냐. 다시 자리를 바꾼다.

부자의 돈가방은 매춘도박장소를 투자하려는 돈인데 잃어버리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고 가난한 사람도 선한 사람인데 복을 주려 했으나 다시 빼앗겨 복을 잃었다. 청년도 하루종일 싸워야 배를 놓치는데 결국 배를 타는 바람에 풍랑을 만나 결국 죽었다.

 

내가 볼 때는 정의이지만 지나고 보니 손해요 아픔, 고통을 사람에게 주었다. 침묵하며 지켜보는 것이 신앙인의 도리이다.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인생이다.

침묵이 옳은지 나서는 것이 옳은지 판단바란다.

 

4살과 5살 아이가 방안에서 논다.

밖에는 햇빛으로 인해 밝으니 밖에 나가서 그 빛을 방안으로 가져오자 하며 밖에 나가서 쓰레받기와 빗자루로 쓸어담는데 방안으로 가져오니 없어진다. 엄마가 그걸 보고 햇빛을 그렇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커텐을 열고 창문을 열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행복을 구하기 위해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들고 나가는 것처럼 세상을 산다.

술도 마시고 아편도 마신다. 그건 아니다. 사람의 방법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다. 열정적이지만 기다림, 인내, 하나님의 뜻에 맡길 줄 알아야 한다.

헌신 겸손 낮아짐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책방에 가면 행복론이 그렇게 많다. 성공론도 많다. 그러나 빠진 내용이 인내, 낮아짐, 겸손, 섬김이 빠져있다.

 

본문 말씀이다.

지난 주 내용과 비슷하다. 진정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이다.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피조물인 우리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잘 아신다. 부모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부모 말씀을 순종치 못해 고집, 반항하다가  실패한 시절을 보낸다. 경험 삶의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 생각보다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더 크게 세우실 때도 있지만 인간의 능력이 무한하다는 것은 과장된 말이다. 한계가 있는 인생이다.

피조물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최고의 복이다.

어린 아이에게 꿈을 가르치라 한다. 그러나 그 꿈 자체가 부도수표로 끝나는 것이 많다. 허황된 꿈일 때가 많다. 세상을 살며 꿈은 줄어들고 물거품이 된다. 기독교인들은 꿈꾸는 사람, 망상의 종교가 아니다. 때가 되면 응답된다.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요셉의 꿈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약속을 배우고 받아야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의 년수가 100세요 90세이다. 사라의 경수조차 끊어졌다. 자손들을 하늘의 별과 같이 주시리라 했는데 인간의 방법으로 몸종 하갈을 줌으로서 더 큰 혼란을 겪는다. 그 후에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으리라 하신다.

인간의 방법으로 몸종을 택한 아브라함과 사라를 책망하고 야단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의 부족함, 어리석음을 아신다. 인간의 방법으로 오히려 고통 불행 실패가 되고 피해를 준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자.

이른 비와 늦은 비처럼 기다린다. 하나님이 웃게 하셨다는 뜻으로 이삭이라 부른다.

말씀대로 순종해야 한다. 손해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엄청난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