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실을 거부하는가
- 입력 : 2010.06.05 03:04 / 수정 : 2010.06.05 21:53
9·11 테러를 미국 정부의 조작극이라고 믿는 미국인이 적지 않다. 심지어 홀로코스트(나치스의 유태인 대학살)조차 날조 또는 과장됐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을 근거가 없다고 거부하는 불합리한 행태를 부인주의(denialism)라고 한다.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는 수단인 부인주의는 특히 과학 분야에서 기승을 부린다.
지구 온난화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으며 인간에 의해 야기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진화론은 기독교를 약화시키려는 무신론자들이 꾸며낸 엉터리 학설이라고 공격한다.
흡연이 폐암과 관계가 있다는 연구결과에 오류가 많다고 반박한다. 부인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 종교적 신념 또는 개인적 이해관계 때문에 과학적 진실을 외면한다.
부인주의 연구 권위자인 영국의 마틴 맥키에 따르면 부인주의자는 여섯 가지 수법을 구사한다. 2009년 '유럽공중보건저널(European Journal of Public Health)' 1월호에 실린 논문에 수법 6개가 소개되어 있다.
▲음모론을 동원한다. 과학적 합의가 증거보다는 공모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이비 전문가를 끌어들인다. ▲증거를 입맛에 맞게 채택한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증거가 아니면 깡그리 쓰레기 취급을 한다. ▲상대방이 수용하기 어려운 수준의 증거를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새로운 증거를 내놓지 못할 때까지 상대방을 몰아세워 굴복시키려는 속셈이다. ▲과학적 사실을 엉뚱한 논리로 공격하여 상대방을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과학자를 믿지 못할 존재로 부각시켜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라는 분위기를 조장한다.
부인주의자는 대부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정상적인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은 자신이 가진 믿음을 확증하는 정보만을 찾아서 받아들이려는 성향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부인주의를 앞장서서 부추기는 사람은 편집증이나 과대망상 따위의 성격 장애를 갖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이들은 일반 대중을 기만하는 음모를 획책하는 권력집단에 맞서 싸우는 순교자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따라서 부인주의자들은 연대의식을 갖고 사회적 쟁점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미국 예일 법대 댄 캐한은 '네이처' 1월 21일자에 발표한 논문에서 지구 온난화를 부인하는 사람은 낙태나 동성결혼 같은 쟁점에 대해서도 공동보조를 취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부인주의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기 쉽다. 미국의 창조론자들은 진화론과 지구 온난화 이론을 싸잡아서 국가 통제를 강화하려는 좌파 이데올로기라고 공격한다. 결국 과학을 정치에 종속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셈이다.
2009년 10월 미국 저술가 마이클 스펙터가 펴낸 '부인주의'는 인간의 불합리한 사고방식이 어떻게 과학의 진보를 가로막고 지구 환경을 훼손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지 생생히 고발한다. 부인주의는 한국사회에도 독버섯처럼 퍼져 있다. 이념이나 지역감정의 덫에 걸려 반대편의 주장이라면 무조건 거부하는 지식인이 어디 한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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