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 진화 종결자 혹은 생태계 폭군
전병근 기자 bkjeon@chosun.com 2011.09.17 03:05
큰 두뇌 활용한 문화적 진화
강력한 과학·기술 힘으로 지구상의 '제왕'이 된 인류
환경·인구과잉·경제 불평등…
새로운 사회 개편으로 상생·조화의 길 찾아야 할 때
진화의 종말
폴 에얼릭·앤 에얼릭 지음|허윤숙 옮김
부키|560쪽|2만3000원
바하마 군도에는 갈색 아놀리 도마뱀이 산다. 연구진이 포식성 도마뱀을 풀어놓자 아놀리는 6개월 만에 다리가 길어졌다. '숏다리'는 느려서 잡아먹힐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 뒤 아놀리는 포식자를 피해 관목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선택'은 역주행했다. 나무를 기어오르는 데는 '숏다리'가 낫다. 아놀리 다리는 6개월 만에 원래 길이로 돌아왔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출현한 지 약 30억년. 진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양태도 다양하다. 식물도 자기나름의 방어책이 있다. 어떤 화초는 독성 물질로 초식 동물 공격을 응징한다. 제왕나비의 섬뜩한 검정-오렌지색 무늬는 먹이로 삼으려는 새들에게 '내 몸 안에 독 있다'는 경고다. 진화의 전략에는 모방도 있다. 어떤 파리는 말벌 같은 모양을 하고 독침이 있는 듯 속여 포식자를 피한다. 이런 것들은 다 생물학적 수준의 유전적 진화에 속한다.
진화에는 그와 질적으로 다른 문화적 진화가 있다. 저자는 인류가 지구상의 지배적 동물로 등극한 결정적 비결이 '바로 이것'이었다며 초점을 맞춘다. 그 중심에 인간의 유별난 두뇌가 있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영장류인 침팬지의 두뇌 용량이 약 400cc인데 현대인 평균치는 약 1350cc나 된다. 전체 몸무게의 2%에 불과하지만 에너지는 20%나 소비한다. 인류는 직립 자세를 취한 후에도 250만여년에 걸쳐 두뇌가 발달하면서 한 차원 높은 문화적 진화의 길을 걸었다.
물론 초보적인 문화는 침팬지도 누린다. 야생 침팬지 새끼는 단단한 열매 까는 법을 배우고 흰개미를 낚거나 창을 만드는 기술도 습득한다. 인간과의 차이는 복잡성이다. 인간의 뇌에는 언어와 의식을 만들어내는 신경 체계가 유독 발달돼 있다. 말을 통해 사상을 전하고, 글을 통해 지역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이를 더욱 널리 전달한다. 이런 재능이 다른 아류들과의 현격한 격차를 만들어냈다.
▲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인간의 뇌가 갑자기 커진 이유는 사회성 때문이다. 두뇌는 점차 다른 집단 성원의 마음을 읽고 행동에 맞춰 자기 행동을 조절하기 위한 필요성 때문에 섬세하게 진화했다. 이른바 '마음의 탄생'이다. 인간의 이러한 예민한 의식은 창발성과 상상력으로 이어져 문화적 진화의 추동력이 된다. 그리하여 인류는 진화의 정점에서 스스로 세계를 바꾸기 시작했다.
◆정복자 호모 사피엔스의 횡포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오늘날 '공포의 제왕'이 됐다. 인류는 동식물 분포를 바꾸고 생명의 화학적 환경을 바꿔놓았다. 씨알이 굵은 물고기를 남획하고 상아용 엄니가 큰 코끼리를 마구 쏴 죽이면서, 물고기는 점점 작아지고 코끼리 엄니는 점점 짧아졌다. 생물 서식지 파괴와 가축들의 선택 교배, 생물 유전자 변형까지 서슴지 않는다. 역효과는 예측조차 어렵다. 미국에 들어온 동아시아산 칡은 하루 30㎝씩 자라나 토종 수목을 질식시킨다. 농업 토양은 대개 1000년에 몇 ㎝꼴로 생기는데 세계 곳곳에서 토양이 10년에 몇㎝ 수준으로 파괴되고 있다. 지하수 개발도 과열되면서 지난 빙하시대에 축적된 물(화석 지하수)의 지하수면은 매년 91㎝씩 낮아지고 있다.
▲
◆공생 혹은 공멸, 기로에 서다
이제 인류는 진화의 새 기로에 섰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유전적·문화적 진화 덕분에 지배적 지위에 오를 수 있었고 강력한 과학·기술에 힘입어 세상을 마음대로 변화시켰지만 이제 그 부메랑이 날아들고 있다. 인류가 이런 환경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6500만년 전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 뒤 변한 기후 조건에 적응하지 못한 공룡의 운명'을 맞을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류는 우선순위를 재조정해 인구과잉, 경제 불평등, 환경 회복력 쇠퇴 같은 문제에 먼저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 사회를 새롭게 재조직해 상호협력을 시도해야 한다."
10만년이 넘는 호모 사피엔스 종의 역사와 운명에 대한 고찰이다. 진화의 기초 개념부터 기후학, 인구학, 국제정치까지 이르는 거대한 스케일에 담긴 정보가 방대하다. 여행에 비유하자면 목적지는 이미 와 본 곳이지만, 여정은 볼거리가 많아 즐거운 독서 체험을 선사한다.
원제 'The Dominant Animal'.
'Refere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수를 사랑하라 (0) | 2011.12.24 |
---|---|
111217 펨토과학 (0) | 2011.12.17 |
110430 미니 코믹 올림픽 (0) | 2011.04.30 |
평양 이발소 (0) | 2011.03.17 |
올레 (0) | 2010.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