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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01 칭기즈칸의 트라우마

[일사일언] 칭기즈칸의 트라우마

 

이주희 EBS PD·'약자를 위한 현실주의' 저자

 

입력2019.08.01. 03:03 댓글 0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은 어린 시절 버림받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작은 부족을 이끌던 아버지 예수게이가 이웃 부족에게 독살당하자 친척들이 칭기즈칸의 가족을 버린 것이다. 칭기즈칸이 아홉 살 때 일이다. 그리고 곧 겨울이 닥쳐왔다.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몽골의 겨울은 그야말로 혹독하다. 더구나 친척들은 이들을 버리면서 가장 중요한 재산인 가축들도 모두 빼앗아 갔다. 과부와 어린 고아들로 이루어진 이 가족에겐 다가올 겨울에 굶어 죽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죽지 않았다.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식물의 뿌리를 캐고 초원의 쥐를 잡아먹으며 끝내 자신들의 힘만으로 겨울을 견뎌내고 살아남았다.

 

같은 고난을 겪어도 그 고난이 트라우마로 남는 사람이 있는 반면 더 큰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사람도 있다. 칭기즈칸은 후자의 전형이다. 친척들에게 버림받고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던 어린 시절은 그에게 '어떤 인간도 믿을 수 없구나' 하는 식의 부정적인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어떤 사람을 믿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고난 속에서도 기꺼이 도움을 주었던 친구들과의 우정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모두 자신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칭기즈칸에게 혈연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의해 선택한 우정이야말로 자신이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가치라는 믿음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면 혈연이나 지연·종교 같은 선천적이거나 이념적인 진영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마련이다. 건강한 '개방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런 개방성 덕분에 칭기즈칸은 이후 혈연이나 종교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세계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칭기즈칸이 건설한 대제국의 출발점은 어쩌면 어린 시절의 버림받았던 기억이 아니었을까.

 

※ 8월 일사일언은 이주희 PD를 비롯해 소설가 김희선,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팀장 김상엽, 대중문화평론가 이문원, 이주윤 작가가 번갈아 집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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