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교수의 명랑笑說> 왕따 가해자의 인권을 두둔하는 세상… '죄와 벌' 분리할 셈인가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입력 : 2012.09.22 03:20 | 수정 : 2012.09.23 07:35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을 회까닥 돌게 만든 건 말 한마디다.
유괴 살해당한 아이에 대한 충격을 신앙으로 막 극복한 때였다. 멋지게 그 극복을 증명하고 싶었던 욕구가 화를 불렀다. 가해자를 찾아가 용서하겠노라고, 잊겠노라고 말하려는 순간 살인자인 웅변학원 원장은 선수를 친다. "그분이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한마디에 아슬아슬하게 전도연을 지탱하던 마지막 한 가닥은 허망하게 무너진다. 피해 당사자가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 회개 끝에 용서가 이루어졌다고? 말은 천 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반대로 천근의 무게로 가슴을 누르기도 하는 법이다.
패닉 상태에 빠진 전도연은 이후 자기와 상의도 없이 멋대로 용서해버린 '그분'에게 죽어라 반발한다. 교회 장로 유혹하여 배 위에 올려놓기, 목사 설교 중에 김추자의 노래 거짓말 틀기 등등. 혹자는 '밀양'을 반(反)기독교 영화라고도 하지만 실은 '죄와 벌'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죄는 어떻게 사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항상 비유와 상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예수지만 가끔 암시도 있었으니 그 마지막이 십자가 위에서 행한 짧은 가르침이다. 십자가에 매달고 양쪽 무릎 아래 뼈를 부러뜨리면 지탱할 힘이 없어 온몸이 밑으로 처진다. 당연히 숨을 못 쉬고 한 호흡이라도 들이마시려면 못 박힌 손을 축으로 삼아 몸을 끌어올려야 한다(주말 아침부터 끔찍한 이야기 써서 죄송하다). 게다가 죽음이 임박하면 세 치 혀를 들어 올릴 힘도 없는 게 인간의 육신이다. 그 와중에 예수는 말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어떤 놈이 오른쪽 뺨을 갈기면 왼쪽 뺨마저 내주라고 했던 평소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 소생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 예수는 죄와 벌이 어떻게 마무리되어야 하는지를 넌지시 알려줬다. 피해자인 자신이 가해자를 용서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절대자인 그 '아버지'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용서는 오로지 피해자의 '권리'라는 사실을.
왕따를 당한 끝에 투신한 학생의 빈소에 가해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찾아왔다. 학생들은 영전(靈前)에 국화를 바치고 머리를 숙였지만 빈소를 나오자마자 키득거렸다고 한다. 그 부모들은 더 가관이다. 자살한 학생 자체가 잘못된 애 아니었냐고 수군댔단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영전에서 가해한 자식을 죽도록 패줘야 한다. 네가 때릴 수 없으니 내가 대신 때려줄게. 그리고 바닥이 젖을 때까지 눈물로 빌어야 한다.
패악질의 화룡점정은 '진보 교육감'이란 사람들이 찍는다. 학교 폭력 사건을 학생부에 기재하지 말란다. 그분들에게 댁의 아이가 당했어도 동일합니까, 같은 유치한 질문 안 한다. 사회적 강자인 그분들의 자녀가 당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존중할 가치도 없는 '인권'만 중요하고 면도칼로 영혼을 찢긴 '인간'에 대한 슬픔과 노여움은 없는 분들이니까.
가상으로 영화 '밀양'을 찍어봤다. 제가 열심히 회개했더니 용서하셨거든요, 가증스러운 소리를 늘어놓는 인간에게 전도연은 한 방 제대로 날린다. "쳇, 놀고 계시네. 누가 누굴 용서했다고 그러니?"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한 '죄'와 받을 '벌'의 총량은 같다. 죄와 벌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반드시 돌려받는다. 아니 받아야 한다. 죄와 벌이 합당하지 않은 이상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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