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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3 엄마다

[ESSAY] 나는 고3 엄마다

  • 이미영 / 주부·대구 수성구
  • 입력 : 2012.10.23 21:07

    "입시 설명회마다 동분서주 용쓰다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졸기 일쑤…
    도대체 웬 전형 방법은 그리 많은지 아이 처진 어깨, 밀려오는 안타까움
    사랑의 ‘엄마표 도시락’ 챙기며 격려 얘야, 이제 조금만 더 참고 견뎌내라"

    이미영 / 주부·대구 수성구
    모두 굳어 있다. 눈동자만 쉴 새 없이 굴리며 눈치를 본다. '얼음'이라는 말은 한 적도 없는데 술래의 명령을 기다리는 모양새다. 내가 '땡'이란 소리를 하지 않으면 아무도 움직일 수 없는 '얼음 땡' 놀이라도 하는 것 같다. 이유 없이 불퉁거려도 지금은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러려니 하고 너른 마음으로 헤아려 준다. 어찌 감히 안부를 묻겠느냐는 태세여서인지 집안 전화기도 제 할 일을 잃은 듯 조용하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친구는 좋은 소식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먼저 물어보기가 조심스러워서 하는 말이니 잊지 말라며 잡은 손을 흔들어댄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좀처럼 울리지 않아서 고장인가 싶었던 전화벨이 집안을 들썩거렸다. 살얼음판 같아서 전화도 못하겠노라는 친정엄마의 목소리였다. 내가 어찌나 살벌하게 굴었던지 몇 번을 망설이다가 수화기를 들었다고 하셨다. 대학입학 수시 원서 접수가 마감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셨나 보다. 며칠을 이렇게 말할까, 저렇게 에둘러 볼까 하다가 별수 없이 우리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벼슬이라도 한다고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나 싶었다.

    지난해 말부터 아이의 입시 준비로 동분서주해 왔다. 학교의 입시 설명회에다 유명한 대입 전문가가 한다는 설명회까지 쫓아다녔다. 용을 쓰며 찾아다닌 탓인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졸기 일쑤였다. 아무리 끌어올리려고 해도 눈꺼풀은 주책없이 내려앉았다. 지하철 객차 한 귀퉁이에서 꺼져가는 정신 줄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리마저 말을 듣지 않고 흐느적거렸다. 애써 말짱한 척해 보았지만 누가 봐도 이부자리에 들기 직전의 꼴이었다. 나라에서는 '고3 엄마 전용 심신허약자석(席)'이라도 내놓아야 한다. 열악한 교육 환경에서 내일의 일꾼을 키우는 엄마들에게 대중교통 이용에서라도 편의를 제공해야 마땅하다.

    도대체 무슨 전형 방법이 그렇게 많은지 몇 번을 들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손에 들고 있는 국자를 찾는다고 수납장을 수십 번씩 들쑤시는 처지에 1000가지가 넘는다는 전형 방법을 무슨 수로 훤하게 꿸 수 있단 말인가. 반복해서 들어봐도 이해할 수 없는 난수표 해독과 같은 것이었다. 더구나 자기소개서 쓰는 방법에다가 논술시험 대비법까지 알아두자니 단순 반복만을 거듭해왔던 뇌세포가 경기를 일으키는지 저절로 뒷목을 움켜잡게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우리 부부는 고3 부모가 되고 나서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입시는 나 몰라라 하던 남편이 뒤늦게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미리 전형 방법에 대한 공부를 해두지 않았다고 타박하지만 정작 속내는 집에서 뭐하느라고 애가 저것밖에 안 되도록 내버려두었느냐는 질타일 게다. 남자들 모임에서도 이야기가 돌고 돌다가 결국에는 자녀문제로 귀결된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자신은 일터에서 부아가 치밀어도 참아내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다주었는데 대입을 코앞에 두고서야 기대했던 것과 다른 현실을 대하고 보니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없을 것을 알기에 그의 어깨만 토닥여줄 수밖에 없었다.

    아침밥을 겨우 한술 뜨고 학교에 갔던 아이가 휘영청 밝은 가을 달을 지고 집안에 들어선다. 처진 어깨와 힘없는 발걸음을 대하니 절로 가슴이 아린다. 수능 시험일이 다가올수록 부담감에 짓눌리나 보다. 곪아터지기도 하고 딱지가 앉기도 해서 얼굴을 온통 뒤덮은 여드름이 '나 정말 힘들어요'라고 대신 말하는 것 같다. 밀려오는 안타까움이 아이의 등 뒤에 매달린 커다란 책가방보다 더 큰 무게로 어미의 가슴을 쓰리게 한다.

    인스턴트식품은 몸에 해롭다고 여간해서는 밥상에 올리지 않았다. 고기도 자주 먹으면 이로울 게 없다고 먹는 횟수를 제한했었다. 하지만 아이의 까칠해진 위장이 음식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는다. 이제는 무엇이든지 입에 맞는 반찬을 해주고 싶어서 햄이든 고기든 가리지 않는다. 도시락을 싼다.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가 안쓰러워 밥을 챙긴다. 엄마표 음식을 먹고 조금이라도 기운이 보태지면 좋겠다 싶어 이것저것 준비해 본다. 깨끗이 비워진 도시락을 보면 잘 먹었다는 말 한마디 없어도 혼자서 미소 짓는다.

    얘야, 너는 지금 인생의 아주 작은 고비 앞에 섰을 뿐이다. 이제 몇 걸음만 더 디디면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길게만 여겨졌던 3년이라는 시간도 벌써 끝자락에 와 있다. 조금만 더 견뎌내거라. 지금까지 한눈팔지 않고 매진해온 너이기에 결과보다는 노력에 먼저 박수를 보낸다. 고3 엄마라 하여 엄살을 부려본들 당사자의 초조함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아이를 쳐다만 봐도 애가 타는 심정은 씩씩한 격려로 바꾸어야 옳을 것 같다. 대학문을 여는 일은 아이에게 맡겨두고 지친 어깨를 감싸줘야겠다. 이제 맛있는 밥을 정성스럽게 해주는 도리밖에 없나 보다. 한술만 먹어도 기운이 돋을 그런 밥을 해야겠다. 나는 사랑의 밥을 푸는 고3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