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신앙의 美 선교사들 술 좋아하는 조선인에 놀라 세례 위한 조건으로 내걸어
"우리 주 예수를 믿던 사람은 만일 수화(水禍)에 몸은 죽더라도 영혼이 하나님께 갈 수 있고 호랑이나 사자에게 죽더라도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거니와 술 먹다 죽으면 어찌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으리오." (1897년 9월 8일 죠션크리스도인 회보)
한국 개신교인들의 생활규범 중 다른 종교인과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으로 '금주·금연'이 있다. 장로교·감리교 등 교단을 망라하는 개신교인들의 금주·금연은 언제 어떤 논리로 시작됐는지를 살펴보는 논문이 나왔다. 윤은순 숙명여대 강사는 7일 오후 2시 서울 새문안교회 언더우드교육관에서 열리는 2009년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심포지엄에서 〈초기 한국 기독교와 금주·금연 문제〉를 발표한다.
윤씨에 따르면 조선에 온 초기 미국인 선교사들은 대부분 엄격한 청교도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춤·담배·카드놀이까지 죄로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인들은 '다만 아편만 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조선인들은) 인생의 단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많은 양의 소주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돈을 버는 것"(알렌)이라는 기록도 있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은 주일성수(主日聖守), 제사 중지, 노름 중단 및 금주·금연을 세례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걸었다. 논리적으로는 ▲'몸=성전' ▲경제력 증진→문명부강 ▲심신 건강 등의 이유를 들었다. 당시 새문안교회 등의 기록을 보면 음주·흡연을 하다 적발될 경우엔 당회에서 권면하고 기도해 주었으며 반복적으로 적발된 경우는 처벌하기도 했다.
개별 교회 단위의 금주·금연 운동은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범교단적이고 전국적인 '절제 운동'으로 확산됐다. 감리교는 1921년 각 지방에 순회강연대를 파견해 금주운동을 폈으며, 1923년부터 매년 10월 첫째 일요일을 '전조선 절제주일'로 정하고 그날 헌금은 절제사업에 사용하도록 했다. 장로교도 1924년에 '기독교 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를 창립하고 산하에 '계독부(戒毒部)'를 뒀다. 또 조선기독교절제운동회, 금주단연동맹 등 개신교 단체들이 조직돼 강연회와 가두선전 등을 펼치면서 금주와 금연은 한국 개신교를 상징하는 생활습관으로 확고해졌다는 분석이다.
윤씨는 "초기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선교사들의 권유에 따라 금주와 금연을 했다기보다는 스스로의 이성적 판단에 의해 결행했다"며 "금주·금연은 개인의 개조와 사회의 정화를 도모하는 도구로 이해되면서 절제운동으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전통과 신앙의 갈등-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의 삶》이란 주제의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이밖에 이숙진 성공회대 강사가 〈저항과 포획의 서사-기독교 신여성의 성·사랑·결혼〉, 신광철 한신대 교수가 〈기독교의 수용은 한국의 전통적인 죽음인식 체계에 어떠한 파장을 불러왔는가?〉를 발표한다. (02)2226-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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