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가평 가스라이팅
한국에도 많은 팬을 가진 일본 록밴드 엑스 재팬이 인기 절정일 때 활동을 중단한 적이 있다. 보컬을 맡은 토시가 돌연 탈퇴했기 때문이다. 빠른 스피드와 초고음이 특징인 엑스 재팬의 명곡들은 토시의 폭발적 성량(聲量)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미친 보컬”이라고 했다. 여기에 강렬한 화장과 화려한 분장까지 더해 그는 팬들에게 카리스마를 지닌 괴력의 남자로 통했다.
▶탈퇴 후 토시는 정반대로 변했다. 수수한 차림에 통기타를 들고 전국을 돌면서 힐링 음악을 연주했다. 종교 단체가 만든 물건도 팔았다. 일본 최고의 괴력남 톱스타의 극적 변화였다. 그 뒤엔 아이돌 여가수 출신 아내와, 아내의 내연남인 종교단체 교주가 있었다. 엑스 재팬의 노래를 “악마의 음악”이라고 하고 내연남이 만든 힐링 음악을 부르게 했다. 못하면 때렸다. 재산도 탈탈 털었다. 10여 년 후 그는 거의 걸인이 돼 밴드에 복귀했다.
▶3년 전 일어난 가평 계곡 익사 사건이 관심을 모으는 것도 의외성 때문이다. 명문대 출신 대기업 연구원이 황당하게 당했다. 그를 지배한 아내는 11살 연하에 외모를 갖췄을 뿐 가난했고 결혼 전 아이도 있었다. 그런데 모든 일을 아내가 시키는 대로 하다가 저축을 몽땅 날리고 거액의 빚까지 떠안았다. 집도 내주고 홀로 반지하 방에서 살면서 아내에게 “만원만 달라”고 했다. 아내와 내연남 농간에 목숨을 잃기 직전 돈에 쪼들려 장기까지 팔려고 했다.
▶스릴러 영화 ‘가스등’에서 비롯된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정신을 지배해 타인을 노예처럼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신뢰 관계를 만든 다음 상대의 판단을 무시해 스스로 의심하고 부정하도록 유도한다. 그 공백을 파고들어 자신의 판단만 따르게 한 뒤 학대하고 약탈한다. 대개 강자가 약자를 가해하지만 엑스 재팬이나 가평 사건의 경우처럼 우월해 보이는 쪽이 약해 보이는 쪽의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다. 겉모습과 상관없이 정서적으로 고립된 사람이 표적이 된다고 한다.
▶가스라이팅 범죄는 사이비 종교만이 아니라 연인, 친구, 가족, 상사와 부하, 군대 등 다양한 관계에서 발생한다. 국가에서도 일어난다. 자유, 민주주의, 평화 등 집단 신념을 부정하고 지배, 굴종, 혐오, 적대감을 심어 국민을 그릇된 길로 동원한다. 국가 권력의 가스라이팅은 개인 사이의 가스라이팅과 과정이 다를 바 없다.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 마오의 중국이 그랬지만 역사상 가장 길게 이어지는 집단 가스라이팅 사례는 북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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