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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문화에 익숙한 쿨한 세대

게임의 법칙에 익숙한 젊은 세대 치열한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아

  • 입력 : 2010.02.06 08:04

[김난도 교수의 '트렌드 노트']
드라마·가요 속 젊은이들도 "돈 좋아 명예 좋아"
경쟁에 한두번 탈락해도 미련을 갖거나 좌절안해
무작정 체제 비판하기보다 현실의 룰 바꾸려 노력
그들의 강점, 나라 발전에 연결시킬 방법 고민해야

"뒤에서 불평만 늘어놓는 '찌질이'로 살 게 아니라 이 사회의 룰을 뜯어고치는 사람이 되란 말이다! 너희들 인생에 전환점이 눈앞에 있다. 뛰어들어라! 공부를 해라! 천하대에 가라!"

방송 중인 TV 드라마 '공부의 신'에서 화제가 됐던 대사다. 열등생 5명이 일류 대학인 '천하대'에 진학하기 위한 특별반에 들어가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인데, 입시 위주의 교육을 미화한다든지 일본 원작을 리메이크했다는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높다고 한다. 위의 대사에서 보듯이 이 드라마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하는 식의 기존 청소년 드라마와는 달리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라'는 메시지를 정면으로 던진다. 이 신물 나는 잔소리에 고개를 돌릴 법도 한데 당사자인 학생들은 정작 뜨겁게 반응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사실 놀라운 것이다. 1990년대 동년배의 청춘들이 불렀던 히트곡의 가사를 되짚어 보자.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놓고 있어. […] 이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서태지, '교실이데아', 1994)

"학교종이 땡하고 울리면서 우리들의 전쟁은 다시 시작된다. 모두의 친구는 모두의 적 모두가 서로 모두 밟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이렇게 싸우다가 누가 살아남나. 가엾게 뒤로 처진 자는 이젠 뭔가?" (젝스키스, '학원별곡', 1997)

"한심한 꼬라지들. 구제불능아라고 자기들 같이 잘난 사람되라고 어쩌고 저쩌고 지지고 짜지고 떠들어대는 껍데기들…." (H.O.T., '열맞춰', 1998)

 

 

입시 위주의 살인적인 교육 현실에 이토록 격렬하게 반항했던 학생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문제아 꼴찌들마저도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대에 가겠다는 드라마라니! 세상이 많이 변했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가요도 부쩍 체제 순응적이 되고 있다. 가장 저항적인 장르라는 힙합만 보아도 그렇다. "우린 학교라는 문턱, 그것을 넘어서면서부터 1등에서 꼴찌 그 사이를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순위의 족쇄를 찬 노예"('인생은 아름다워', 2002)라고 소리쳤던 리쌍이 이제는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2009)의 사랑을 읊조린다. 다이나믹 듀오도 이제는 "먼 훗날에 설 자리를 위해서는 몇푼이라도 더 벌자, 즐겨 듣는 음악 DJ DOC이지만 돈 좋아 명예 좋아"('어머니의 된장국', 2008)라고 노래한다. 최근 힙합 앨범의 타이틀곡들은 체제를 비판하기보다는 이처럼 사랑한다거나 힘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가수들의 저항 정신이 약해진 탓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가사가 유약해지는 것은 그것을 소비하는 계층의 취향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에픽하이는 아직도 사회 비판적인 가사를 담은 노래를 내놓고 있지만, 대중적 관심은 부드러운 곡에 더 많이 쏠린다. 대중문화 상품은 사회의 거울이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소비자들의 욕망과 가치관의 흐름을 비춘다.

이제 젊은 세대는 무작정 체제를 비판하는 데 힘을 쏟기보다는 그 경쟁에 뛰어들어 '룰을 바꾸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경쟁시대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케이블TV 프로그램에서도 확연하게 눈에 띈다. 작년 큰 화제를 불러모았던 '슈퍼스타 K'는 우승자에게 1억원의 상금과 가수 데뷔의 기회를 준다는 프로그램이었다. 무려 72만명이 지원했다. 경쟁이 더 뜨거워질 때마다 케이블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바꿔나갔다.

최후의 1인만이 살아남는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우후죽순처럼 선보이고 있다. 신문기자·요리사·패션모델·패션디자이너·패션에디터·사진작가 등 수많은 영역에 도전하는데, 모두 경쟁률이나 과정의 치열함이 상상을 초월한다. 젊은 시청자들은 이 천문학적 경쟁을 뚫은 우승자에게 환호를 보내는 것은 물론이고 중도에 낙오하는 탈락자에게도 호의 어린 위안을 보낸다. 그래서 우승하지 못하고도 유명인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인기는 경쟁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것을 즐기는 젊은이가 늘었다는 하나의 증거다. 사실 요즘 젊은이들은 대학 입시나 취업은 물론이고 인턴·아르바이트·장학금 신청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수십대 일은 흔한 일이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공한족(恐閑族·한가한 것이 두렵다는 의미)이라고 불릴 만큼 스펙(spec) 쌓기에 열심이다. 설령 경쟁에서 한두번 탈락하더라도 미련을 갖거나 크게 좌절하지 않는다.

이러한 세대적 분위기는 이들이 즐겨온 게임문화와도 관련이 깊다. 요즘 젊은 세대는 대부분 인터넷 게임을 하면서 성장했는데, 수시로 이기고 수시로 지는 '게임의 법칙'에 익숙해 있다. 'GG'라는 게임 용어를 아는가? 굿게임(Good Game)을 줄인 것인데, '스타크래프트' 게임에서 패배를 선언할 때 쓰는 말이다. 일종의 항복 표시이긴 하지만 '좋은 게임이었다. 패배를 인정한다. 하지만 즐거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GG는 이제 게임 이외의 영역에서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됐다. 쿨(cool)하게 질 줄 아는 세대인 것이다.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 경쟁을 구조화시키고 있다. 비정규직 정규화, 잡 셰어링, 정년 연장 등은 기성세대에게는 복음일지 몰라도 젊은 구직자에게는 높디높은 담장이다. 젊음의 특권인 저항정신마저 거세시키며 경쟁의 일선에 내몰린 후속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기득권의 양보를 포함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치열한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대, 전공·컴퓨터·어학을 망라해 자기 역량을 끊임없이 키워온 세대, 그래서 단군 이래 가장 뛰어난 경쟁력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세대다. 이들의 강점을 산업과 나라 발전에 연결시키는 것은 특정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적 책무다. 나라의 내일이 이들에게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