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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110319 슬픔을 이겨내는 힘

 슬픔을 이겨내는 힘

 

과학문화연구소장·KAIST 겸직교수  이인식

입력 : 2011.03.19 03:03

 

3·11 대지진과 쓰나미, 원전 방사선 누출사고가 겹친 국가적 위난 상황에서 일본 국민이 보여준 침착성과 질서 의식은 해외 언론의 격찬을 받고 있다. 시신이 무더기로 발견되고 마을이 초토화된 생지옥에서 충격과 공포를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가족의 죽음, 전염병의 창궐, 테러리스트의 공격 같은 재앙을 겪은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연구하는 신경과학자와 심리학자들은 희생자 대부분이 빠른 속도로 정신적 안정을 되찾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이처럼 고통과 슬픔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레실리언스(resilience)'라고 한다. 레실리언스는 원기를 회복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용수철이 되튀어 원래 상태가 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 단기간에 제자리로 돌아가는 특성을 레실리언스라 이른다.

레실리언스 연구의 선구자는 미국 컬럼비아대 임상심리학자 조지 보내노이다. 그는 1990년대 초부터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사람들의 정서 반응을 연구했다. 그 당시 일반적인 통념은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 죽게 되면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내노는 실험을 통해 기존 통념과 달리 사별한 사람들에게서 마음의 상처가 생긴 흔적을 찾아낼 수 없음을 확인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별 이후 몇 달 만에 원래의 생활로 돌아갔으며 놀라울 정도로 환경에 잘 적응했다. 슬픔을 극복하는 능력은 유전자가 특별하거나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만이 보여주는 특성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셈이다. 요컨대 심리적인 레실리언스는 거의 모든 사람이 본성으로 타고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보내노는 연구 범위를 사별과 성격이 다른 사건의 고통으로 확장했다. 어린 시절 성적으로 학대를 받은 여성, 9·11 테러에서 살아남은 뉴욕 시민, 전염병으로 사경을 넘나든 홍콩 주민을 만나서 고통을 겪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불행을 아주 잘 극복해낸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결과 죽음, 질병 또는 재난 직후에 1/3~2/3는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로 분류되는 수면 장애나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6개월 이후에 그런 증상이 나타난 사람은 10%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2009년 9월 펴낸 '슬픔의 다른 얼굴 (The Other Side of Sadness)'에서 보내노는 인간의 본성에 가깝기 때문에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 인위적 노력을 가하는 것은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비탄에 잠긴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라는 보내노의 이론에 반론이 없을 수 없다. 더욱이 미국 육군이 100만명 이상의 병사와 가족들을 대상으로 레실리언스 능력을 향상시키는 계획을 추진 중에 있어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3월호의 커버스토리에 따르면 '사상 최대의 심리학적 실험'으로 여겨지는 이 계획의 효율성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보내노는 레실리언스가 본성이므로 육군의 계획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부작용만 일으킬지 모른다고 비판했다. 어쨌거나 레실리언스 이론은 쓰나미와 대지진으로 고통받는 일본 사람들이 정신적 외상을 단기간에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