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전 한국 땅에… '개신교 씨앗' 뿌린 거인들 기린다
조선일보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입력 : 2015.03.20 03:00
-초기 선교사 현양 물결 이어져
아펜젤러 도착한 4월5일 기념 연합예배·입항 퍼포먼스 계획
숭의여대, 설립자 마펫기념교회… 도마리아 여사 일기·편지도 출간
부활절이던 1885년 4월 5일 오후 3시 제물포. 3월 23일 일본 요코하마를 출발해 나가사키와 부산을 거쳐 온 배에서 벽안의 20대 남녀 셋이 내렸다.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각각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였던 이들의 도착으로 한국 개신교는 본격적으로 막을 열게 된다. 선교 130년을 맞는 올해 개신교 초기 선교사들을 현양하는 다양한 움직임이 펼쳐진다. 감리교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모자(母子) 선교사 기념행사를 4월 초에 갖는다. 숭의여대는 평양을 중심으로 북한 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사무엘 마펫(한국명 마포삼열·1864~1939)의 기념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호남 선교의 거목 돗슨(한국명 도마리아·1881~1972) 여사의 일기와 편지가 책으로 엮여 출간됐다.
◇130년 전 그날의 감격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의 설립자. 스크랜턴 모자는 사대문 밖 서민 동네에 아현감리교회와 동대문교회, 상동교회를 설립하고 무료로 약을 나눠줬다.
①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가 한복을 입은 모습. ②평양을 무대로 신학교와 숭실전문, 숭의여학교를 세운 사무엘 마펫 목사. ③숭의여대에 지어진 숭의마펫기념교회. ④돗슨(오른쪽) 여사가 한센인 부부의 미감아를 안고 있다. 작은 사진은 그의 일기·편지를 엮은 책 '조선에 길을 묻다'.
올해 부활절은 4월 5일, 130년 전과 날짜가 똑같이 겹친다. 감리교는 교단 차원의 준비위원회를 꾸렸다. 아펜젤러가 130년 전 조선에 올 때와 같은 시각인 오후 3시 인천항 선교 100주년 기념탑에서 아펜젤러 입항 재현 퍼포먼스를 벌인다. 이어 참가자들은 인천항에서 인천 중구 내리교회까지 행진해 이곳에서 교단 간부 등 1000여명이 기념연합예배를 드린다. 이 자리에는 스크랜턴 선교사와 아펜젤러의 선교를 위해 그 당시 2000달러를 헌금한 '숨은 공로자' 가우처 박사의 후손들이 초청됐다. 또 선교 130년의 은혜를 '130명 각막 이식 수술'로 갚는 모금과 각막 기증 서약 캠페인도 시작한다. 감리교는 그 밖에도 올해 미국 NGO를 통해 북한 황해도에 진료소 2곳을 건립하고, 나진·선봉 지역 나무 심기 지원 사업을 벌이는 등 선교 130년을 계기로 교단 역량을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평양 3숭(崇)'의 아버지 마포삼열
마펫 목사는 미국 선교사 대부분이 서울에 머물던 시절 평양으로 갔다. 그리고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만들었다. 그는 장신대와 총신대의 전신인 평양장로회신학교를 만들어 최초의 장로교 목사인 길선주 목사 등을 배출했으며 '평양 3숭(崇)'으로 불린 숭실전문,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를 설립했다. 1936년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가방 2개 달랑 들고 쫓겨나다시피 미국으로 귀국해 숨진 그의 유해는 지난 2006년 서울 광진구 장신대로 옮겨왔다.
이번엔 기념교회다. 서울 남산 자락 숭의여대는 지난 연말 교내에 160석짜리 아담한 예배당을 완공했다. 4월 9일 헌당예배를 갖는 이 교회의 이름은 '숭의마펫기념교회'. 숭의학원 윤순희 이사장이 사재(私財)로 건립한 이 교회 입구 복도엔 마펫 목사의 활약상이 사진과 함께 패널로 정리돼 있다. 아낙네들로 북적이는 길거리에서 문자 그대로 노상 전도하는 장면부터 1907년 최초의 장로교 목사 안수식, 아라비아 숫자 '123456789'가 쓰인 칠판 앞에 아주머니들이 흰 머릿수건 쓰고 책 펴고 앉은 숭의여학교의 여자성경학교 모습 등이 한국 개신교 초기 풍경을 웅변한다. 헌당예배에는 마펫 목사의 손자도 참석할 예정이다.
◇光州를 사랑한 여인 도마리아
개신교 초기 자료 전문 연구자인 양국주씨가 도마리아의 편지와 일기를 정리·번역한 '조선에 길을 묻다'(서빙더피플)엔 100년 전 조선, 특히 호남 지역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도마리아는 1912년 조선에 도착해 38년간 광주를 근거지로 조랑말과 가마 타고 조선인 '전도부인'들과 함께 전남·북 방방곡곡을 누볐다. 여성들이 헌금 대신 내놓은 비녀, 은반지, 은장도, 호박(琥珀) 등 패물을 팔아 교회를 신축하고, 직접 배추 키워 학교 비용으로 쓰고, '김장방학'을 하던 시절 이야기가 이채롭다. 여성들의 공론장인 우물가를 찾아가 '쪽복음'을 나눠주며 '입소문 전도'하는 풍경도 여성이기에 접근 가능한 선교 루트였다.
길에서 얼어 죽기 직전의 한센인을 발견하고 데려와 거두면서 시작된 여수 애양원 이야기, 일제가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성경학교 폐교로 맞서고 미국으로 귀국하라는 권고도 무시하고 조선에 남겠다고 자청해 결국 6개월 동안 가택연금을 당한 사연 등이 눈길을 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광주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으로 둘러싸여 있는지 감히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다"던 그는 정작 미국에 가서는 어색해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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