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당한 사람
170716 조원형목사님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누가복음 9:57~62)
호주 오스트레일리아의 메칠 켈리 작가가 쓴 "행복한 나"에서 성공한 은행가 한 사람이 여름 휴가로 바닷가에 묵는다.
어부들의 삶을 보며 새벽에 나가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본다. 부지런함도 본다. 새벽에 나갔다가 배 한척이 한낮 즈음에 돌아온다.가보고 묻는다. 만선이라서 돌아왔다 한다. 만선이라도 고기를 내려놓고 또 잡으러 나가야 할텐데 오후엔 안나가는가 했더니 오후엔 가족과 함께 하겠다 한다. 그렇게 해서 언제 부자가 되느냐 배를 늘리고 기업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했더니 어부의 대답이 당신의 말대로 하여 얼마나 걸리겠는가 했더니 30년 즈음이라 한다. 30년후 부호가 되었다면 무얼하겠는가 했더니 나처럼 휴가를 즐기겠다 하니 어부는 지금 그 휴가를 즐기고 있다고 대답한다.
도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일에 만족하느냐가 행복의 기준이다. 내 삶이 행복하고 감사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 작품중 3가지 질문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무엇인가 묻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과 가장 중요한 때는 무엇인가 묻는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이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라고 말한다. 지금 만나는 사람, 지금의 일, 바로 지금 최선을 다하는 것이 행복이다. 행복이란 첫째 소유에서 얻는다. 공부해서 지식을 얻었다던가 수익을 얻었을 때이다. 둘째는 경험 체험에서 얻는 행복이다. 세째는 자신 삶의 의미를 생각할 때 행복을 얻는다.
하버드대학 에드워드 엔 교수의 "창조적 단절"에서 창조를 위해 새로운 삶의 변화를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와 단절해야 한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과거를 단절해야 한다. 과거란 지난 날들, 인간 정욕의 일들이다.
일본인들은 남녀간에 너무 개방되어 문제가 많다. 성적인 문제도 그렇다. 그러나 한번 결혼하기로 하면 과거를 청산한다. 그리하여 결혼생활을 우리보다 더 오래 유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를 단절치 못해 문제가 발생한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과거는 죽을 각오로 끊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과거를 붙들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성경은 늘 깨어라 한다.
프랑스 칼레 시청앞 칼레 시민의 상이라는 동상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 전쟁을 할 때 1347년 영국의 승리로 끝난다. 이에 여욱이 프랑스에 요청한다. 영국을 대항한 7명을 처형하겠다 한다. 당신들이 처벌하면 화해하겠다 한다. 이에 칼레 시장이 자신의 목에밧줄을 걸고 내가 먼저 죽겠다 한다. 그리하여 7명 이상이 나온다. 처형날 영국 황태자의 아내가 임신했다. 이 아이의 복을 위해 7명을 살려 주라 청원하여 7명이 처형을 면한다. 이를 기념하여 칼레 시민의 동상을 세웠다. 죽고자 하는 마음이어야 이긴다. 과거 욕망을 단절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라는 것이다.
십여년전 애굽 고고학자들이 유물을 발견하고 연구한다.
이상한 문서를 본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한 여성과 사랑을 나누는 문서이다. 그 글을 남긴 것이 2천년 전의 고서로서 의견이 분분하다. 한 여성과의 사랑 이야기 때문에 신앙이 흔들린다. 지금도 이단들이 많다. 지금 이단의 글이 수천년 후에 발견된다면 그걸 믿어야 하는가. 당시에도 이단이 있었다는 것이다. 과거를 단절하고 나서도 자신의 결단에서 시험에 든다.
오늘의 본문 말씀이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세 제자들의 이야기이다. 예수님을 따르며 고백하는 것이 제각각이다.
먼저, 열정형이다. 죽는데까지도 따르겠다 한다. 그러나 신앙의 깊이가 없다. 여우의 굴이 있지만 인자는머리둘 곳이 없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나를 알고 따르겠느냐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며 야망을 가진 자이다. 예수님을 믿고 복받고 잘 되는가. 고난을 받은 후 복받는 것이지만 예수 믿는 목적이 복받는거라면 어려움이닥치면 예수를 버린다.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둘째, 회의형 제자이다. 주를 위해 죽기까지 하겠다 해 놓고 시험을 당하니 하나님의 뜻을 뒤로 미루고 갈등하다가 육신의 길을 선택한다. 아버지의 장례를 먼저 선택한다. 박흘레이 주석가는 옥스퍼드대에서 아프리카를 깨우치기 위해 명석한 유학생을 공부시킨다. 한 장학생이 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오겠다 한다. 아버지가 몇살이냐 했더니 40이라 한다. 세상 혈연 정욕에 미련을 둔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욕망을 먼저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본다.
세째, 인정형이다. 예수님을 고난의 예수님 그대로 본다. 어린 양으로 보고 따르며 충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신의 남은 일을 해결 후 오겠다 한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말처럼 지금 만나는 사람을 위해야 하는데 회피, 포기한다는 것이다. 미루다가 모든걸 잃는다.
유대인의 전설이다.
마귀 중에 이별 전담꾼이 있다. 가족간 친구간에 헤어지는 일만을 전담한다. 그 마귀는 어떻게 이별시키는가.
먼저, "왜"라는 의심을 갖게 한다.
둘째, "혹시"라는 의심을 갖게 한다.
세째, 다시 생각해 보라 한다.
그리하여, 봉합할 수 없는 의구심으로의 단계에 이른다.
오늘의 교훈이다.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운전하며 뒤를 돌아보면 대형 사고 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향한 목적을 상실치 말아야 한다. 우리 정욕의 삶의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영적인 결단의 삶을 살자.
'말씀 > 조원형목사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0806 부인할 수 없는 능력 (0) | 2017.08.08 |
---|---|
170723 나의 평안을 주노라 (0) | 2017.07.25 |
170709 빚진 자 (0) | 2017.07.10 |
170625 내게 주신 경륜 (0) | 2017.06.28 |
170618 이제야 복이 되리라 (0) | 2017.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