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초대 교회를 찾아서]
[2] '크리스천'의 시작은 이 컴컴한 절벽 동굴이었다
안디옥·다소
유대인들의 박해 피해온 '난민들의 교회' 안디옥…
다소의 바울 생가터엔 복음처럼 마르지않은 우물이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사도행전 12장 25~26절)
시리아 국경에서 가까운 터키 안타키아(현지명 하타이) 시내에 들어서면 저 멀리 거대한 바위산이 한눈에 꽉 찬다. 찬찬히 살펴보면 바위산 절벽 중턱 곳곳에 구멍이 나 있다. 절벽 중턱에는 베드로가 기도했다는 동굴교회가 있다. 동굴 안쪽 벽에는 천국의 열쇠와 두루마리 성경을 양손에 든 베드로상(像)이 있다. 꽉 들어차면 100명 정도가 서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이런 동굴에서 역사상 최초로 '크리스천'이란 호칭을 받은 초대 교회는 시작된 것이다.
성경에 안디옥으로 표기된 이곳은 로마 시대에 로마·알렉산드리아와 함께 3대 도시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 안디옥이란 지명은 BC 300년경 시리아 왕국의 셀레우코스 1세가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붙여 안티오키아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이 왕조는 영토 내 여러 도시에 같은 이름을 붙였고, 이 때문에 이 도시를 다른 곳과 구분하기 위해 '수리아 안디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곳은 '난민 교회'로 시작됐다.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이 순교하는 등 유대교인들의 박해가 심해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북쪽으로 500㎞ 정도 떨어진 안디옥으로 피란와서 신앙을 지켰다.
시리아 국경에서 가까운 터키 안타키아(현지명 하타이) 시내에 들어서면 저 멀리 거대한 바위산이 한눈에 꽉 찬다. 찬찬히 살펴보면 바위산 절벽 중턱 곳곳에 구멍이 나 있다. 절벽 중턱에는 베드로가 기도했다는 동굴교회가 있다. 동굴 안쪽 벽에는 천국의 열쇠와 두루마리 성경을 양손에 든 베드로상(像)이 있다. 꽉 들어차면 100명 정도가 서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이런 동굴에서 역사상 최초로 '크리스천'이란 호칭을 받은 초대 교회는 시작된 것이다.
성경에 안디옥으로 표기된 이곳은 로마 시대에 로마·알렉산드리아와 함께 3대 도시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 안디옥이란 지명은 BC 300년경 시리아 왕국의 셀레우코스 1세가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붙여 안티오키아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이 왕조는 영토 내 여러 도시에 같은 이름을 붙였고, 이 때문에 이 도시를 다른 곳과 구분하기 위해 '수리아 안디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곳은 '난민 교회'로 시작됐다.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이 순교하는 등 유대교인들의 박해가 심해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북쪽으로 500㎞ 정도 떨어진 안디옥으로 피란와서 신앙을 지켰다.
▲ 시리아와의 국경에 가까운 터키 남부 안타키아 실피우스산의 동굴교회. 베드로가 기도했다는 이 동굴교회 한쪽에는 박해를 피해서 피신할 수 있는 작은 구멍이 돌산 속으로 이어지게 만들어져 있다. /김한수 기자
구브로(키프로스)에서 로마 총독 서기오 바울을 전도하는 등 성과를 올린 바울은 터키 내륙의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옮겨간다.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救主)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며 설교한 그는 유대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힌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려 했으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永生)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에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고 선언하며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이 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異邦)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하셨다."(사도행전 13장 47절) 바울이 '땅끝 전도'를 선언한 비시디아 안디옥은 현재 터키 중부 얄바치라는 곳 부근이다. 서울 광림교회 순례단이 찾은 이곳엔 황량한 들판에 비잔틴시대에 건축된 교회터만 남아 있었다.
평생 네 차례에 걸쳐 총 7만㎞를 걸으며 당시 서방세계의 중심인 로마제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바울의 고향은 터키 길리기아 지방의 작은 마을 다소(타르수스)였다. 바울은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小邑)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사도행전 21장 39절)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현재 다소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소읍이었다. 마을 입구에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안토니우스 장군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을 기념하는 아치형 석조문만이 이곳이 한때 번창한 도시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바울의 생가터로 알려진 곳에는 돌로 만든 우물 하나가 남아 있었다. 관리인은 순례단을 위해 뚜껑을 열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려줬다. 우물물은 지금도 맑고 시원했다. 마르지 않은 이 우물물처럼 바울이 전한 복음은 2000년 동안 세계를 적시고 있다.
▲ 서울 광림교회 김정석 담임목사와 성지순례단이 2010년 5월 2일 오전 터키 남부 안타키아의 성베드로동굴교회에서 예배 후 성찬례를 올리고 있다. /김한수 기자 hansu@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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