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형상
141109 조원형목사님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라디아서 4:17~20)
"무엇이든지 다 파는 가게" 상호의 주인이 손님을 기다린다.
아침 일찍 청년이 찾아와 묻는다. "정말 무엇이든지 다 팝니까?" "다 팝니다." "권력과 명예도 팝니까?" "그럼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권력과 명예를 드리겠습니다." 조금 후에 봉투를 내밀며 여기 있다 말한다. "우리 가게에서는 씨앗만 팝니다." 어떤 씨앗인가? 성실, 충성, 지혜의 세가지 씨앗이다. 가슴속에 세 씨앗을 심고 열심히 살면 권력과 명예를 얻을 수 있다.
우리 신앙인도 성령의 열매로 노력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성공, 명예 등의 좋은 씨앗을 파는 가게 옆에는 짝퉁 가게도 있다. 권모술수 등의 씨앗을 파는 가게도 있게 마련이다.
본문의 사도 바울은 말씀에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라 말씀한다.
눈물과 아픔과 십자가의 고통으로 해산의 고통과 아픔을 안고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키우며 간다.
켄 블랜차드가 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은 자녀 교육, 대인 관계에서 읽어보면 좋다.
해상공원 씨월드에 구경갔다가 고래 쇼를 본다. 3톤의 범고래가 조련사의 요구대로 움직인다. 나중엔 조련사가 3톤 고래등까지 타고 헤엄친다. 사람들이 감탄에 감탄을 거듭한다. 결국 작가의 기질로 조련사와 인터뷰한다. 어떻게 그렇게 훈련시켰길래 포악하다는 범고래가 순종하느냐? 비결은 긍정적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이라 대답한다. 칭찬과 격려이다. 부정적인 반응과 비통은 금물이다. 뒤통수치기가 한번만 있어도 모든 것이 수포가 된다.
세 사람중 한 사람이 잠시 자리를 뜨며 그 사람을 흉본다. 대인 관계는 신뢰만이 믿음을 가게 한다. 고치기 위해서 책망도 필요하지만 칭찬과 격려가 더 소중하다. 신앙인은 말에 대한 조심을 해야 한다. 골방에서 둘이 한 이야기도 동네방네로 퍼진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이 책에서 먼저, 긍정적인 마음과 신뢰하는 마음과 애정어린 마음이 물속의 동물일지라도 변화시키게 된다. 긍정적인 사랑으로 대하면 말못할 짐승도 순응한다. 두번째는 잘못한 것에 초점을 맞추면 안된다. 잘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세째는 자녀를 키우거나 대인 관계의 개선이 필요한 사람은 벌을 주지 말고 시간을 주라. 교육이란 시간을 주는 것이다.
마태복음 9:7~10에서 자녀가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는 사람이 없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는 사람이 없다고말씀한다. 자녀에게 비난, 책망, 미움보다는 격려, 따뜻함을 주어야 한다. 농사도 시간이다. 시간을 주어야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 죽을 때까지도 자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자식이 깨닫는 기한이 아니다. 죽고난 다음에 깨닫는 경우도 있다. 남편때문에 젊은 청춘의 때를 고생하며 보내지만 자식마저도 지 애비닮아 고통을 주더라도 참고 참으며 교육시키다가 "피는 못속인다"는 말 한마디에 물거품된다. 문제는 내 자신이 죽을 때까지 선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한다면 긍휼의 은총을 베푸신다. 이러한 망씀이 오늘 본문 말씀이다.
본문 4:19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하여 "나의 자녀들아" 말씀한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표현한 것과 동일하다. 복음을 전하고 가르침으로 나의 자녀들이라 칭한다. 이단의 말처럼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자녀를 키운다는 의미이다. 영적 아버지요 어머니라 말하는 것은 이단의 시작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 도 한분이시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아버지라 함은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성경을 볼 때 비유적인 말씀, 깊히 감추어진 말씀을 잘 깨닫고 헤아려야 한다.
"내 자녀들아" 말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의 마음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이 말씀도 비유이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형상이이루기까지"이다.
신앙을 잘 지키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여타 종교에서는 부처가 되고 신이 된다고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그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내 생활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기까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한다는 것이다.
"해산의 수고" 이것도 비유이다. 복음을 전하고 목회하는 자의 고통을 말한다. 우리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거듭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충성을 다해야 한다.
기독교인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닮기위해서이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닮는 것이다.
요즈음 교회 문제는 시설 문제가 아니다.
교육 방법 문제도 아니다. 내용과 목표가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목표가 홍익인간이지만 학교에서 얻는 것은 지식밖에 없는 것이 문제이다. 옛날엔 많이 배운만큼 백성을 위한 성숙함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인간성이 교육되어 있지 않다. 오래된 기독교인은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은 많은데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것이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까지 해산의 고통을 가지고 수고한다는 것이 본문 말씀이다.
사각 링위에서 아이가 권투를 한다. 권투가 아닌 공부이다. 부모가 별별 주문을 다하니까 아이가 지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하고 나가뻗어버린다. 거듭난 신앙,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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