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조원형목사님

141207 나의 택한 그릇이라

나의 택한 그릇이라

 

141207                                                                                                    조원형목사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도행전 9:15~19)

 

 

미국의 의사 한분이 쓴 수기이다. 환자들을 진료하며 쓴 과정이고 감정이다.

위장병 환자에 대한 글이 눈에 띈다. 유전적 요인도 있지만 환자들간 비슷한 동기가 많다. 이에 의사는 중얼거리고 수술한다. "돼지만도 못한 놈...."이라 한다. 인간같으면 다 먹거나 다른 짐승이 못먹게 조치를 취하는데 아무리 사나운 맹수이고 적대 관계에 있는 짐승일지라도 70~80%만 위를 채운다 한다. 그러나 사람을 해부해보면 120~150%를 먹어 위가 확장되고 견딜 수 없어서 위장병이 생긴다. 실컷 먹고도 토해내고 또다시 먹고 싶어한다. 자신에 대하여 절제하지 못하고 탈이 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입장에서 쓴 글이다.

먹는 것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우리 속에 감추어진 욕망이 드러난다. 게걸들린 것이 두 종류가 있는데 사람이고 또하나는 뱀이다. 뱀은 어금니가 없어서 삼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만 먹으면 모두 소화시킬 때까지 더이상 안먹지만 사람은 절제하지 못한다. 먹는 것은 사람의 자유이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먹으면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공자의 말씀도 소식하라 했다.

 

못된 인간을 짐승같다 하지만 동물보다도 더 타락하고 방종한 것이 인간이다.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마음속에 두 마음이 싸운다 했다. 욕망을 쳐서 복종케 하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한다. 항상 깨어 있는다고 한다. 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끝까지 욕심을 부리는 것보다도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원수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여야 자신의 마음의 쉼을 얻는 것이 인간이다.

 

본문 말씀은 사울이라는 사람의 욕망이다. 끝까지 추적하여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욕망의 소유자인 사울이다. 바른 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요즈음 동성애 문제가 심각하다. 자연적이냐 병적이냐 말하지만 고쳐야 할 병이다. 이성이 병들면 나침판이 고장난 것과 같다. 여행하는 사람이 나침판이 고장나면 큰 변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한다. 그것을 고쳐야지 허용한다면 병든 것이다. 사상도 문제이다. 공산주의 사상 종북사상이 문제이다. 곁모습은 보통 사람과 같으나 그 속은 괴물이다. 이성이 타락하면 잘못된 판단으로 망조에 이른다.

이러한 사람을 예수님이 부르시고 귀하게 쓰는 그릇으로 만드신다. 미래지향적인 사람으로 되어야 한다. 삶의 방식이 과거에 매이면 안된다. 미래를 보고 긍정적 삶을 살아야 하는데 과거에 사로잡힌 삶을 산다. 옛 이야기가 원수갚는 이야기가 많다. 대를 물려가며 원수가 원수를 낳는다. 과거, 오늘의 일도 씻어내어야 한다. 인생을 가로막는 큰 장벽을 없애야 한다.

 

역사가 팔스 에어드는 개인이나 권세욕에 빠지면 반드시 망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공의의 맷돌은 악을 반드시 분쇄한다. 벌이 꽃의 꿀을 훔쳐오지만 그 꽃은 그로 인하여 열매를 맺는다. 날이 어두울수록 별이 성명해지고 반드시 새로운 세상이 온다. 역사가의 말이다.

 

다메섹 교회의 목회자이지만 인간 생각으로 고민하는 아나니아가 깨닫는 것이 본문 말씀이다.

사울은 유대 교리에 어긋나는 사람을 죽이는 장본인이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장면의 장본인인 사울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아나니아이다. 그리하여 사울이 거듭나서 바울로 된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선을 선택해야 한다. 다메섹 교회의 목회자 아나니아는 동료 스데반 집사의 순교 소식을 듣고 유대교와 사울에 대한 감정이 매우 컸다. 교회의 원수중의 원수인 사울에게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는가. 그러나 아나니아는 결국 말씀에 순종한다. 그리하여 그 사람을 찾아간다. 청년 사울을 안수하여 눈을 보이게 하고 요긴한 큰 그릇이 되게 한다.

누군가 용서하라 하시는데 태산같은 감정이 가로막혀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을 부셔뜨려야 한다.

 

그리스 화가 티만테스는 유명한 화가이다. 처음엔 스승이 제자 티만테스의 첫 그림을 보고 칭찬한다.  다음날 아침 다시 와보니 칭찬했던 그림이 박살나있다. 그 스승이 그랬던 것이다. 자만하지 말고 만족하지 말고 다시 시작하라고 한다.

상한 감정, 원수된 감정으로 쓰일 수는 없다. 용서하고 베푸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말씀 > 조원형목사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1221 부름받은 사람들  (0) 2014.12.21
141214 성령을 따라 난 자  (0) 2014.12.14
141130 말씀의 능력  (0) 2014.12.01
141123 말씀께 부탁하노니  (0) 2014.11.23
141116 해산의 수고  (0) 2014.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