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향하여
200216 박재덕목사
(사도행전 13:44~52)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바울의 설교이다.
예수님을 힘입어 죄사함 받고 의로움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당시 설교자의 지명은 회당장이 했다. 바울이 회당장의 허락을 받지는 않았을걸로 추측된다. 백성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듣고 주일마다 또 듣기를 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죄사함을 받고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내용을 한번 더 듣기 위하여 온 민중이 모였다.
그 중에는 열성적 유대인들이 있어 시기하고 반박하고 비방했다. 결국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쫒아낸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의 축소판이다. 유대인들은 반박하고 이방인들은 받아들이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유대인들이 모이면 회당에서 말씀을 나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앉을 자리에 일반 민중들이 모두 모여 자리를 차지하여 앉아있다. 그러하니 기분이 나쁘다. 유대인으로서 자기의 자리에서 전통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방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주 전에도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신들만의 커뮤니티가 무너졌다.
이에 바울의 말에 꼬투리를 잡고 비방한다. 메세지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죄를 바울에게 뒤집어씌운다.
자신들은 율법을 이어받아 그 전통을 지키고 있는데 이방인들고 구원을 받는다면 선택받았다는 특권 의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46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말하기를 먼저 너희에게 당연히 전해야 할 것이지만, 제일 먼저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하는 것이지만 너희가 먼저 거부했다. 그러하니 이방인에게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리의 출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복음 메세지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이방인에게 전하는 것이라 말한다.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유대인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였기에 이방인을 향하는 것이다. 안디옥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에 이사야 49:6말씀을 인용한다.
이방의 빛으로 삼아 땅끝까지 이르게 하겠다는 말씀이다. 앞 부분의 말씀은 바울은 생략하였다. 메시야의 사명을 이사야가 말한 것인데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현실로 적용시킨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 탄생시에 시므온이 예수님을 안으며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 찬양한다.
이 모든 것이 유대인들이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그 복음의 특권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는데 그 예루살렘과 온 유다에서 그 지도자들이 특권이라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에게는 큰 기쁨이 된다.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기쁨이 되었다. 선택받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예수를 통하여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는다.
작정된다는 뜻은 배정되고 등재된다는 것이다. 믿음은 작정의 결과이다. 작정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결국 믿음은 하나님이 믿기로 선택한 자들이다.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기로 작정하고 선택한 자들이다. 이러한 내용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여전히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공격적으로 바뀌고 신체적 폭력까지 가한다. 유대인 시내의 귀부인과 유력자들은 집정관들이다. 이들이 박해하여 누명을 씌워 바울과 바나바를 쫒아낸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는 발끝 티끌을 떨어내고 이고니온으로 향한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다고 누가는 기록한다. 누가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바울과 그들에게 눈의 촛점을 계속 맞춘다.
발끝 티끌을 떨어뜨리는 행동은 옛날 이방인에게 했던 행동인데 이제는 다시 유대인들에게로 향한다. 상대를 안하겠다는 것이다.
이방인들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웠을 것이지만 오히려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기록한다. 이는 성령께서 인도하신다는 뜻이다. 이곳에서도 성령이 충만했다는 것이다.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뜨렸다. 이는 처음엔 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으나 거부하기에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뜨린다. 그들은 은혜 안에 거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을 떠나 120km 이고니온으로 향한다.
유대인들의 특권이 먼저 복음과 은혜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거부하였기에 이방인들을 향한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믿지 않는 가족 친구들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나온다. 한국 교회도 기생충이지 않는가 생각해 본다. 신분 상승을 꿈꾸는 기생충이다. 한국 교회도 예수님께 빌붙어 기복주의를 꿈꾸는 기생충이지 않는가 생각해본다. 뭔가 이득을 위해 착취해 가는 것, 부와 명예를 얻으려 하는 것, 주인이 없을 때 거기에 들어가서 온갖 것들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것이 우리 현실이지 않는가.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다.
기득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회복을 원하는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이유이다.
이방인을 위해서 나아갔던 바울과 바나바를 배워야 한다. 기득권을 가지고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유대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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