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예수교회에 대한 명예 훼손으로 인한 내용의 지적이 있어 권리 침해에 의해 제한되었던 글을 수정보완하여 다시 올립니다.
소녀야 일어나라
200906 주승중목사
(마가복음 5:35~43)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얼마 전 한 언론에 모태신앙인 한 청년이 2020년 8월 "한국에서 개신교회는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글을 올렸다.
그 글에서 청년은 이렇게 말한다.
"온라인 예배, 거리두기 등 정부의 방역지침을 철저히 준수하고 세상과 발을 맞추는 교회들도 있다. 그러나 종교를 믿지 않는 대중들에게 이 구분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이제 '교회'라는 단어 자체가 불쾌한 이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무교인 내 친구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교회 자체가 너무 싫어'
나는 그 친구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국 교회의 회생은 쉽지 않을 것이다....2020년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에게 교회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 28세의 모태신앙 청년-
할아버지가 목회자인 이 청년은 한국의 몇몇 교회가 공공 방역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을 하고 또 교인들이 역학조사를 거부하고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는 방역요원들에게 침을 뱉는 등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비신앙적이기까지 한 행동을 보고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한국의 개신교회가 이 사회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라고 탄식했던 것이다.
이 청년의 글에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2020년 8월에서 9월로 향하는 이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에 한국교회는 이 사회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이는 사형선고가 아니라 이미 죽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특별히 목숨까지 바치고 교회를 지킨 신앙 선배들의 수고와 노력이 이렇게 한순간에 매도되고 끝없이 추락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이 상황은 마치 너무나 사랑하는 내 자녀가 내 품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버선발로 뛰어나가는 오늘 본문의 한 남자와 같은 상황이다. 바로 자신의 딸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로 뛰어간 회당장 야이로 말이다.
이스라엘 북단에 있는 갈릴리 해변 옆에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곳에는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유태인의 회당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사건은 바로 가버나움 회당의 회당장의 12살짜리 어린 딸이 병들어 죽은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보통 유대교 회당에는 여덟명의 장로가 지도하는데 그 장로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회당장이다. 따라서 회당장은 유대교에 철저히 헌신하고 율법에는 능통하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가버나움의 회당장 야이로가 자기 딸의 병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사실 이 건은 그 당시의 사회 분위기나 역사를 살펴볼 때 거의 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 때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때였고 정통 랍비 출신도 아니고 단지 시골 목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미 이단시비가 있는 젊은 랍비였다.
이런 상황에서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 발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그 당시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럼에도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의 모든 체면을 뒤로 하고 딸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 달려왔다.
이 회당장 야이로의 심정이 곧 우리의 심정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너무도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께 나아가 매달리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때ㅍ 우리 주님께서는 야이로의 죽은 딸을 향해 "달리다 쿰 - 소녀야 일어나라" 말씀으로 죽었던 소녀를 일으켜 세우셨다.
우리는 야이로의 행동을 통해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회복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요한 메세지를 듣게 된다.
먼저, 야이로는 겸손히 예수님 앞에 나와서 엎드렸다.
22절 말씀에서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며...' 말씀한다.
유대교에서 대표적인 위치에 있는 회당장 야이로가 당시 유대교로부터 이단자로 낙인찍힌 벎은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간곡히 구했다는 것은 그 당시 통념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야이로는 자신의 모든 지위와 체면을 다 내려놓고 참으로 겸손하게 주님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간곡히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구했다. 예수님은 그의 이런 행동을 귀하게 보신 것이다.
비록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라고 하는 확실한 믿음은 없었다 할지라도 딸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엎드린 그의 겸손을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신 것이다.
이런 야이로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 한국교회를 생각해 본다.
오늘 한국교회는 우리가 보기에 정말 억울할 정도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대로 우리 내부에서조차 한국교회는 사형선고를 받았다든지 심지어 한국교회는 죽었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한국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회당장 야이로의 모습에서 한국교회가 해야 할 모습을 깨닫는데 그것은 바로 진정한 겸손이라고 많은 분들이 이야기한다. 정부와 방역당국과 언론이 삼박자가 되어서 마치 한국교회가 코로나 재확산의 온상인 것처럼 왜곡하며 희생양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억울하다고 말한다. 정말 특정한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우리 교회를 포함해서 한국 대부분의 교회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몇개 교회의 잘못을 가지고 마치 전체 교회가 코로나 재확산을 가져온 것처럼 비난을 받고 있으니 어찌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분명 억울한 점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런 억울한 마음과 섭섭함을 잠시 내려놓고 한번 생각해 보자.
지금은 사랑제일교회와 각 지역마다 교회발 확진자가 집단으로 계속 터져나오고 있다.
사랑제일교회발 확진자가 벌써 1200명을 넘어서고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광화문발 확진자와 이에 연루된 교회들의 지속되는 확진은 매일같이 터져나오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방역에 힘써온 교회들은 억울한 마음도 있겠지만, 그러나 지금은 계속해서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몇몇 교회들에 의해서 감염이 계속되고 있기에 우리는 이것을 남의 일이라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한국교회의 문제이다.
그래서 안믿는 사람들은 지금 교회에 대해서 큰 원망과 분노를 가지고 있다. 김태영이라는 한 이코노미스트는 그의 글에서 '8월 집단 감염사태는 그 동안 힘들게 거둔 K방역의 성공과 한국경제의 성과를 산산조각 내면서 방역을 무너뜨리고 경제를 큰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고 하면서 한국경제를 위협에 빠뜨린 세력중의 하나가 교회라고 지적한다.
그 동안 가까스로 연명했던 숙박업과 음식점업과 여행업계, 그리고 소상공인들은 지금 패닉상태에 놓여있다.
예를 들어 대면예배를 고집한 상가교회에서 확진자가 나오면 그 상가에 있는 모든 상점들은 일주일동안 문을 닫아야 한다. 그야말로 먹고 살 길이 막히는 것이다. 방역당국은 교회의 주일종교 활동을 비대면으로 해달라고 거듭 호소했지만 그럼에도 일부 교회는 여전히 대면예배를 강행했고 언론은 정부의 지침을 어긴 교회발 지역사회 전파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된다는 보도를 하고, 그런 보도가 이어지면서 지금 교회를 향한 국민들의 비난과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상태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코로나를 전달하고 있다는 등,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교회가 세상의 안전과 평안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위협하고 근심걱정거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지금 세상 사람들은 개신교에 대해서 이번 엠브레인 트랜드 모니터에서 설문조사를 했다. 그랬더니 개신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들, 이중적인 사람들, 사기꾼같은 사람들,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세상에 뭐라고 말해야 되겠는가.
교회발 확진자 때문에 상가문을 닫아야 되고 그로 인하여 자녀들의 생계가 막연해지고 겨우겨우 영업을 이어가다가 결국 영업을 멈출 수 밖에 없게 된 소상공인들에게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제자라면 뭐라고 말해야 하겠는가.
이에 대하여 새문안교회 이상학 목사는 "교회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라고 해야지 않겠나 말한다.
"속에 억울한 마음이 있더라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결국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요 친구들에게 빈정거림을 당하면서 흔들리는 교회 안의 젊은 세대를 얻는 것이요 한국 교회의 미래 선교를 여는 말이 아닐까"
이 말에 동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 겸손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다시 한번 진정 겸손해져야 한다. 그 동안 우리가 너무 교만해졌다. 불과 선교 100년 사이에 너무나 빠른 속도로 성장해서 세계에서 가장 큰 20개 교회가운데 10개 교회가 한국에 있고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교회도 한국에 있다보니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너무나 우리가 자랑스러워졌다. 그래서 세상이 뭐라 하든 우리끼리만 잘되고 성장하면 된다고 하는 대단한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닌지, 양적으로 성장하면 그것이 최고라는 바벨탑의 복음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한국교회가 민족의 아픔과 사회의 부정적인 시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면예배를 강조하면서 그것이 마치 우리의 절대가치인 것처럼 내세우는 것은 바로 우리의 교만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그러나 한국교회는 이제 그런 우리의 교만과 착각을 내려놓고 우리 자신을 진정 겸손히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진정 겸손하게 돌아보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이다.
"예배드리면 죽인다고 칼이 들어올 때, 목숨을 걸고 예배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배모임이 칼이 되어 이웃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안서교회 고태진 목사의 말이다. 이런 겸손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
둘째, 야이로는 인내하면서 주님을 기다렸다.
12살된 외동딸이었고 생명이 위협적인 상황이었다. 야이로는 참으로 겸손하게 무릎꿇고 예수님께 부탁했고 모시고 가고 있었고 가는 길에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자유받게 되었고 그 사이에 그의 딸은 기어코 죽고 말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마가복음5:34)
예수님의 말씀이 진행되고 있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딸이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 예수님의 발걸음이 혈루증 여인을 치유하며 지체되는 그 순간에 회당장의 딸이 죽게된 것이다. 이 순간이 야이로에게는 크나큰 시련이었다. 이제 겨우 모시고 가고 있는데 한 여인 때문에 지체되어 그 유일한 희망이 다 날아간 것이다. 야이로에겐 낙망과 시련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한가지 진리를 깨닫는다.
주님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에게도 믿음의 시련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믿음으로 예수님과 동행하면 만사가 다 잘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아브라함, 요셉, 다윗도 만사형통한 것이 아니었다. 요셉은 감옥에도 갇혔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라도 인생의 험한 계곡을 지나게 된다. 때로 주님을 모시고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믿음의 시련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온실의 화초는 쉽게 죽지만 자연의 온갖 풍상을 맞고 자란 화초는 쉽게 죽지 않는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시련과 역경 가운데서도 인내해야 한다.
이번 코로나로 인해 역경을 받고 있는 우리에게 성장 일변도의 값싼 은혜만 추구하는 미성숙한 우리가 성장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훈련 과정이 아닐까. 시련과 역경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깨닫고 우리만을 위한 이기적인 것이 아닌 타자를 위한 교회의 본질을 완전히 회복하기를 바란다.
세째로, 야이로는 두려움없는 믿음으로 나아갔다.
한 여인 때문에 지체될 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리는 어떻게 하겠는가.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식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마가복음 5:35)...숨이 끊어지면 그걸로 끝이다. 인생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인생의 한계가 죽음인데 야이로는 인생 최대의 절망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모든 소망은 사라졌고 경험적 판단에 의하면 절망인데 야이로는 치유자인 예수가 아니라 부활의 주님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구세주로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주님으로 고백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너무 감사하게도 이 위기의 순간에 딜레마에 있던 야이로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누가복음 8:50)
예수님의 초월적인 말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듣고 야이로는 예수님을 계속 집으로 모시고 간다. 그 말씀이 무엇인지 잘 몰라도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계속 모시고 간 것이다. 보통의 상식 이성이면 예수님 제 딸이 죽었답니다 인사하고 돌아섰을 것인데 그는 돌아서지 않았다. 그 순간 예수님의 말씀을 다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모시고 간 것이다. 그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몰아내신 것이다.
예수님이 죽은 아이를 보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했을 대 비웃음을 당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상황인데도 야이로는 주님의 말씀을 믿었다. 예수님은 순박한 그의 믿음에 부활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한국교회와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현주소는 무엇인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절망의 소식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진정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젠 끝났어. 한국교회는 사형선고를 받았어. 죽었어.'라고 말하는 속에서 믿고 부정적인 것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고 부활의 주님을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기에 매 주일이 작은 부활절이다. 작은 부활절인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한국교회 쿰!! 한국교회야 일어나라. 한국교회 성도들아 일어나라.
이제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그 불가능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너희의 불신앙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그 의심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너희의 질병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그리고 일어나서 부활하신 주님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26)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요한복음 11:40)
바라기는 우리 모든 성도들과 상처투성이인 한국교회가 부활신앙으로 다시 일어나 우리 민족과 나라를 섬기고 치유하는 교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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