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주승중목사님

200712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200712                      주승중 목사

 

(로마서 8:26~27)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양평의 한 시골마을 교회 이야기이다.

갓 집사된 서리집사님이 처음으로 수요 대표기도 순서를 맡게 되었다. 기도문을 써왔는데 떨려서 그것을 읽는 것도 쉽지 않았다. 더듬더듬 읽고 있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눈앞이 깜깜하여 기도가 횡설수설되었고 마이크도 꺼져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앞에 앉았던 나이든 권사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해야지 한다. 이에 서리집사님이 아차 하는 마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신히 기도합니다"한다.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지만 이것이 기도의 기초를 알려주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기도는 간절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해야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신히라도 기도하는 것이 귀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삶의 순간마다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기도는 기독교인들이 살아 숨쉴 수 있는 생명력이 되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우리 영혼의 호흡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를 소홀히 하거나 하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마땅히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아니하고 또 기도한다고 해도 바르게 간구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육신의 연약함이 기도를 방해한다.  또 너무나 바빠서 기도하지 못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 하셨는데 제자들은 육신의 피곤함으로 잠을 잤다.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6:40~41 말씀이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2017년 12월 목회자 협의회와 지엠컴 리서치가 실시한 한국인의 종교 생활과 신앙인의 의식 조사에 따르면 한국 기독교인들의 하루 평균 기도 시간이 나온다. 얼마라고 생각하나. 21분이다. 2004년에는 27분이었고 2012년도에는 24분으로 줄었고 2017년도엔 더 줄어서 21분이다. 지금 조사하면 20분도 안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에게 왜 기도를 못하는지 물었더니 "바빠서, 피곤해서" 응답이 72%이상이다. 현대인들은 바빠서 피곤해서 기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단순히 기도 시간만이 줄어든, 이 뿐만이 아니다.

또한 자신의 신앙이 전년과 비교하여 어떠냐는 질문에는 좋아졌다는 응답이 16.9%인데 더 나빠졌다는 응답은 26.8%였다. 기도 시간이 줄어든 만큼 신앙이 나빠졌다고 본인들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바쁘다 하여 기도를 못함으로서 우리의 신앙이 더 나빠지고 있는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어떻게 기도해야 할런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또한, 때로는 우리가 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구하는 경우도 있다.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잘못 구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기도하기 보다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서 기도하는 경우가 더 많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청탁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원수들을 모두 물리치시고 높은 왕좌에 오르실 것인데 그 때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했다. 두 아들의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께 두 아들을 데려와서 간구한다. 마태복음 20:21에서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청탁한다. 예수님의 대답이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하셨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어떻게 되는가.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좌우편에는 강도들의 십자가가 세워진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채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자신들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을 따라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잘 모르고 기도하는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다.

특별히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고 구할 때도 있다. 우리가 볼 때는 당장은 좋은 길인거 같고 당장은 화를 면할 수 있는거 같지만 나중엔 더 큰 어려움을, 더 큰 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러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잠언 14:12, 16~25를 보면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말씀이 나온다. 우리의 정욕과 욕심을 따라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번째, 우리 기도 응답의 지연이다.

우리의 기도 응답이 지연될 때 많이 힘들어 한다. '하나님 언제까집니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됩니까.' 탄식하며 지쳐서 기도를 포기할 때도 있다. 가족 구원을 위해서, 남편 구원을 위해서, 부모 형제들을 위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오랜 기간동안 기도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어떤 권사님은 남편을 위해서 40년이 넘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편분은 내가 보기에 아직도 완강하다. 그 권사님은 포기 상태로 눈물도 메말랐다. 어떻게 구해야 될지도 몰라 탄식한다. 우리들 가운데는 자녀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분도 있다. 건강의 문제로, 직장과 사업의 문제로 탄식하며 기도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오랜 세월동안 눈물로 호소하고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은 들려오지 않고 기도하면 할수록 오히려 하나님은 더 멀리 계신거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소리높여 기도하면 할수록 더 깊은 공허감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우리가 절실한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그 응답이 더디고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일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 자녀들을 위해서, 직장 문제를 위해서, 여러가지 문제로 인하여 기도하는 순간에도 우리 마음속에 답답함이 가득 찰 때가 있다. 깊은 실망과 좌절감에 빠질 때가 있다. 기도의 한계성을 느끼면서 좌절하며 탄식한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기도의 한계와 좌절감을 가리켜서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육신이 연약해서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를 하지 못한다. 우리가 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정욕대로 잘못 구한다. 또한 기도함에도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 때 탄식하며 어떻게 빌어야할지를 몰라 기도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기도의 한계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갈등과 고민이 생겨난다.

 

그런데, 기도의 한계를 인식하고 좌절할 때, 그 때에 참된 기도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 로마서 8:26에서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사도 바울은 말씀한다.

우리의 유창함도 아니요 우리의 간절함도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기도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할 수 없는 연약함 가운데서, 기도한다 해도 우리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 잘못 구하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성령님이 안타깝게 기도하시기에 우리는 참되게 기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돕기 위해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보혜사 파라클로토스' 옆에서 돕는다, 돕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함께 짐을 져준다는 것이다.

짐을 지고 가다가 더이상 버틸 수가 없어 주저앉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와서 적극적으로 들어줄 때에 쓰는 단어이다.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시되 특별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을 통하여 도우신다는 것이다.

로마서 8:26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지으심을 입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좌절하고 절망할 때에 성령님께서 친히 간구하신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 백성들이 기도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시는 성령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탄식하며 기도하신다는 것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직접 예배드리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지금 인터넷으로라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나. 이것은 성령님이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하시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가 기도를 게을리하고 기도하되 잘못 구하는 우리를 위해서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함께 짊어지시고 계시다. 기도할 힘이 없어 마땅히 기도할 바 조차 포기한채 앉아있는 우리를 위해서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 짊어지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오늘도 기도하고 계시다. 오늘 성령님의 탄식의 기도가 없으면 오늘 이 은총의 자리에 앉아있지 못할 수도 있다.

 

때로는 기도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코로나의 위기 가운데서도 오늘 이 은총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간구하심 때문이리라. 오늘 로마서의 말씀이 우리의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된다.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는 은혜가 된다.

로마서 8:27에서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영국의 작가 윌리엄 제이콥스의 '원숭이 손' 단편 소설이 있다.

영국의 군인 화이트는 인도에서 돌아온 부하에게 주술사의 마술에 걸린 원숭이손이라는 기념품을 얻었다. 이것은 살아있는 원숭이손을 잘라서 미이라로 말린 것이다. 이것을 붙잡고 말하면 세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반신반의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소원한다. 지금 나에게 200파운드의 돈을 다오 한다. 얼마 안되서 처음보는 사람이 찾아와서 200파운드의 돈을 건네준다. 이해되지 않아 이 돈이 무슨 돈이냐고 묻는다. 당신 아들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기계에 끼어 죽었기에 부의금을 가져왔습니다 한다. 이에 충격받고 통곡한다. 그러면서 원숭이손을 붙잡고 소원을 빌면 되겠다는 생각에 제발 내 아들을 돌려달라고 소원을 빈다. 한참만에 아들이 돌아왔는데 유령이 되어 돌아왔다. 유령이 된 아들은 고통하며 괴로워한다. 이에 화이트는 세번째 소원을 말한다. 내 아들을 편히 쉬게 해 주시오.

 

이 짧은 소설을 보며 깨닫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기도대로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지금 지옥가운데 살고 있겠구나.

우리의 기도대로 각자 욕심대로 기도가 이루어졌다면, 지난 날 언젠가 우리가 다 아들달라고 기도한대로 이루어졌다면 지금은 다 남자들만 남았을 것이고 인류는 멸종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의 기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우리가 은혜가운데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로마서8:27에서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께서 우리와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 조용히 무릎끓고 성령님의 기도 소리를 듣자. 성령님의 탄식하시는 기도를 들으며 우리의 기도를 회복하자. 우리의 생을 포기하고픈 생각이 들 때조차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기도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에 우리가 기도를 회복할 수 있다.

'말씀 > 주승중목사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06 소녀야 일어나라  (0) 2020.09.10
200719 다른 길 높은 생각  (0) 2020.07.31
200503 어린이를 용납하라  (0) 2020.05.03
200426 사명에로의 회복  (0) 2020.04.27
200419 도마의 쌍둥이는 누구?  (0) 2020.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