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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주승중목사님

200419 도마의 쌍둥이는 누구?

도마의 쌍둥이는 누구?


200419                                주승중목사님


(요한복음 20:24~29)

열두 제자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한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부활절 두번째 주일에 모두에게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빈다.


사만다 푸트맨이라는 한 미국 여성이 있는데 한국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3개월때 미국 가정에 입양되어 미국인으로 성장했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연기를 하는 배우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SNS에 아니에스 브로드에라는 프랑스 여성이 친구 신청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사만다와 그녀는 너무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사진을 도용한 협박으로 느꼈지만 아니에스로부터 온 메세지를 보고 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이 여성은 자신의 일란성 쌍둥이였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태어난 쌍둥이 자매가 어떤 사정인지는 몰라도 한명은 미국으로 또 한명은 프랑스로 입양되어 20년이 넘는 세월을 살다가 재회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다큐멘타리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2013년 부산영화제에서 투인 시스터즈라는 이름으로 상영되었다. 옆의 사진은 이 영화의 포스터이다.

놀라운 것은 20년을 다른 환경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외모와 체형이 거의 흡사해서 그 누구도 쌍둥이임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도 한 쌍둥이의 이름이 등장한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이다. 디두모는 아람어의 표현이고  도마는 헬라어의 표현으로서 둘다 쌍둥이라는 뜻이다. 그가 쌍둥이였다면 또 다른이는 누군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그가 쌍둥이였다는 사실은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인데 본능적으로 서로 시기하고 다툴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따라서 부모님이 쌍둥이를 키울 때에는 옷도 신발도 가방도 똑같은 것으로 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둘이 다투게 된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차별 대우를 받는다고 의심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성경학자들은 쌍둥이인 도마에게도 갈등과 의심이 성격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말한다.

쌍둥이로 태어난 도마는 선천적으로 논쟁적이었고 매사에 이성과 논리를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마치 깨알같이 쓰여진 보험 약관의 내용을 다 읽어보지 않고는 결코 보험 계약에 서명하지 않을 신중한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는 한가지 습관이 생겼는데 그건바로 의심하는 습관이었다. 도마의 의심하는 습관은 오늘 본문에서도 드러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보고 또 만져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요한복음 20:25에서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이 말씀은 도마의 의심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도마의 의심하고 회의하는 이 태도에 대해서 우리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우리는 도마의 이 의심하는 태도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에서만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요한복음에 기록된 다른 사건들을 보면 도마는 결코 비관적인 회의나 부정적인 의심만 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처음 도마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매우 용기있고 결단력있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 때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셨는데 유대임들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돌로 치려했을 때 예수님은 당신의 때가 안되었으므로 예루살렘에서 벗어나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건너가신다. 그런데 예루살렘 지척의 베다니에 살고 있는 친구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연락이 온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신다. 이에 제자들이 요한복음 11:8에서 "선생님,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하면서 반대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다, 내가 깨우러 간다 하시면서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키려고 배다니로 가자고 말씀하신다. 이 때 다른 제자들은 다 머뭇거렸는데 도마가 나타나서 말한다. 요한복음 11:16 말씀이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도마는 예수님께서 하시겠다고 마음먹은 일이라면 자신도 마음을 굳게 먹고 주님과 함께 가서 죽을 결심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함께 동고동락하던 주님께서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들이 득실거리는 유대땅으로 가시려 할 때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외쳤던 사람은 수제자 베드로도 아니었고 주님의 사랑받던 제자 요한도 아니라 바로 도마였다. 도마는 늘 의심과 회의만 하던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사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죽을 각오도 했던 헌신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장에서 고난주간 수요일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던 그 밤에 예수님은 당신이 떠난 다음을 준비시키는데 두려움과 걱정가운데 있던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시면서 요한복음 14:2~3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리고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너희가 아느니라 말씀하신다. 그러자 제자들 모두는 예수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듣지를 못해서 당황하며 침묵하는데 도마가 다시 나선다.

요한복음 14:5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합리적인 성격의 도마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너무나 모호하고 비논리적으로 들린 것이다. 도마의 질문은 제자들 모두의 질문이었는데 아무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을 때 도마가 대변하여 질문한 것이다. 도마는 솔직했고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겠다는 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역설적으로는 주님이 가시는 곳이 어딘지 확실히 알아야 그곳을 따라갈 수 있지 않습니까 하는 질문이다. 주님과 떨어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는데 주님이 그들을 두고 어디론가 가신다는걸 말씀하시니 거기가 어디냐는 것이다. 확실하게 말씀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죽음의 길이라 해도 기꺼이 같이 가겠습니다 라는 말이다.

성경의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서 도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면 도마는 무조건 의심하고 부정적 회의에 빠지는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다.


물론, 그는 쌍둥이로 태어나 본능적으로 의심하고 회의하는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의심과 회의는 보다 확실한 믿음을 위한 의심이었고 보다 굳건한 신뢰를 위한 회의였다. 지구촌교회 열두제자 연구소 이동원 원로목사님이 "열두 문, 열두 돌"에서 도마를 말한다.

"그는 회의에 참 사람이지만 절망적 회의론자는 아니다. 그는 차라리 구도적 회의론자에 가깝다. 그는 진리를 찾고 있는 회의론자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미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더 놓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주님 앞에 질문을 묻고 있는 신앙적 회의론자다."


그는 의심많은 도마, 불신앙의 도마가 아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 것은 사실이었고 그런 모습속에서 의심하고 회의하는 도마를 볼 수 있지만 그 회의는 불신앙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의심을 넘어 참된 신앙에 도달하기 위한 고통스런 과정이었다.  그것은 그 다음주에 또다시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도마의 모습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된다.

신앙적 회의론자였던 도마,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던 도마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다시 나타나신 것이다. 가시적 증거를 요구하는 그에게 요한복음 20:27에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도마가 했던 의심의 말, 도마가 가졌던 신앙적 회의를 다 듣고 알고 계셨다.

요한복음 20:25에서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는 도마의 말에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던 주님이시지만 도마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요구했는지 다 알고 계셨다. 하면서도 주님은 그 어떤 책망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도마가 요구한대로 다 들어주셨다. 예수님은 의심과 신앙적 회의에 빠져있는 도마가 원했던대로 그의 눈 앞에 당신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시면서 너 손가락을 넣어 확인해 보라고까지 말씀하신다. 그가 믿을 수 있도록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도록 증거를 확실하게 제공해 주셨다. 그래서 그의 모든 의심과 회의를 해결해 주셨다.

이에 도마가 손가락을 내밀어 주님의 상처 자욱에 넣어보았을까. 아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자신의 손을 넣어보았다는 기록은 없다.


이탈이아의 유명한 화가 카라바치오가 "의심하는 도마"라는 유화에서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는 모습을 그렸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다르다.

성경은 다만 그 순간에 터져나온 도마의 고백만을 기록한다. 요한복음 20:28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도마는 사실 자신의 손가락을 주님의 몸에 넣을 이유가 없었다. 그자리에 계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언행과 자신의 요구를 다 알고 계시는 분, 자신의 요구하는 부분을 다 보여주신 분이라면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입에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이 마침내 터져나온 것이다. 도마의 이 신앙고백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베드로의 고백과 함께 제자들의 입에서 나온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하나님이라 했던 고백은 제자들중 도마가 최초로 했다. 베드로는 주가 그리스도시고 메시야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지만 나의 하나님이라고 한 고백은 도마가 처음이다. 이 고백은 더 이상 흔들림이 없는 신앙고백이다. 이 고백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한 이의 고백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재 창조, 뉴크리에이션(New Creation)의 역사를 이루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고백이다. 도마에게는 더 이상 의심은 사라졌다. 더 이상 신앙적 회의도 사라졌다. 온전히 신앙의 사람, 신뢰의 사람이 되었다.

비가 온 뒤 땅이 굳어지듯이 도마의 진지한 의심과 진지한 회의는 그의 입에서 놀라운 신앙 고백이 터져나오기 위한 산고의 과정이었다. 참된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의 과정이었다.


미국의 유명한 조직 신학자인 폴 틸리히는 "의심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라 믿음의 일부"라고 말했다.

도마의 의심은 우리 신앙의 의심과 회의에 관한 것이다. 솔직히 우리들도 도마와 같은 의심과 회의로 인하여 고민하는 때가 종종 있다. 이에 대하여 헨리 나우엔은 도마와 관련하여 말한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자아가 존재한다. 신뢰하는 자아와 의심하는 자아다. 도마는 이 두 가지 모습을 모두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대 신앙인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대로 내가 생각하는대로 이루어질 때는 우리의 신뢰하는 자아가 주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주님이 확실히 존재하시는군요 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때로는 일이 잘못되면 원하는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금새 우리의 의심하는 자아가 튀어나와서 주님 어디 계십니까 주님이 저의 고통을 알기나 하십니까 주님이 정말 계십니까 하면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주님의 존재에 대해서조차 의심하며 회의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의심과 믿음 이 두가지는 우리에게 쌍둥이처럼 늘 붙어다닌다. 그러므로 도마는 우리와는 상관없는 2천년전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바로 도마에게 숨어있는 쌍둥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서두에서 도마는 쌍둥이였고 그 쌍둥이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쌍둥이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닌가.


의심은 무조건 부정적이거나 우리가 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도마를 통해 개달을 수 있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다.

신앙 생활하는데 있어서 의심을 제기하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으로 여겨왔다. 우리는 의심하면 믿음없는 사람으로 오해받을까봐 속으로는 의심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닌 척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은 우리 신앙을 바리새적인 위선으로 만드는 모습이다. 솔직한 의심, 정직한 의심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틸리히가 말한대로 의심은 믿음의 일부일 수 있기 대문이다. 정직한 의심을 통하여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정직한 회의를 책망하거나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의 솔직한 의심과 신앙적 회의를 고백할 때 결코 외면치 않으시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터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우리는 의심과 회의를 넘어서서 참된  신앙으로 나아가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의심과 회의를 극복하나.

도마는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지 말고 교제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이 첫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 요한복음 20:24 "열두 제자중의 하나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하였더라" 성경은 분명히 기록한다.

도마는 쌍둥이로 자라면서 경쟁을 하다보니 자기 주관이 강하고 독립심이 있었기에 다른 제자들은 두려워서 모여있었지만 그는 혼자 거리로 나가 방황하고 있었는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너무나 충격이어서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없어서 홀로울고 있었는지,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외칠 정도로 용기있는 사람이었기에 홀로 밖으로 나가서 바깥 상황을 살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믿음의 공동체로부터 이탈했다. 그로 인하여 너무나 소중한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부활하신 주님을 뵐 수 있는 기회를,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리고나서 주님의 나타나심을 믿을 수 없노라고, 내 손가락으로 그의 못자국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회의에 빠졌다.


우리가 의심과 절망속에 있을 때 할 수 있는, 하게 되는 최악의 행동은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로부터 나자신을 떨어뜨려놓는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로부터 떨어져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치명적인 행동이다. 이 행위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있을 때 교회의 교제 가운데 우리 주님의 임재하시고 역사하심을 우리가 놓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2세기 말에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미국의 청교도들은 매우중요한 신앙의 원칙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주일 예배를 포함해서 주중의 어떤 집회도 결코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구촌교회의 이동원 원로목사님은 그들이 그렇게 한데는 매우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교회를 통해서 행해지는 어떤 집회에도 결코 빠지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의 신조였다. 왜냐하면 언제 주께서 우리를 방문하실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에 주님이 오셔서 영광과 축복을 그들에게 전해주실지, 언제 그들 가운데 기적을 행하시고, 삶의 놀라운 변화를 주실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 당신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주실지 모른다.

그 순간에 내가 그 은총의 자리에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자리, 그 시간에 우리 모든 성도가 한분도 빠짐없이 있게 되기를 바라기를 축원한다. 히브리서 10:24~25에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종말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써야 하는 것은 모이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바로 그 자리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양드릴 때 그 자리에 임재하시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이다.


비록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예배당에 모여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지 못하지만 이제 곧 모든 것들이 지나갈 것이다.

그 때 우리는 다시 주의 이름으로 모이게 될 것인데 사모하고 바라는 마음으로 모이기를 더 힘쓰고 예배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임재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과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모여야 할 것이다. 주의 전에 모이면서 울컥하는 그 마음을 우리 주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반드시 우리에게 만나주시고 말씀해 주시고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주님의 못 자욱난 그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회복해 주실 것이다. 열정적으로 감격하는 마음 사모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배당으로 모이자.


도마는 일주일뒤에 또다시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요한복음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그 자리에 있어서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고 그의 입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감격적인 고백이 터져나왔다. 그의 믿음은 그의 의심을 넘어서서 확고한 신앙고백 위에 굳건히 서게 되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의심과 회의에 빠져있는 도마에게 찾아가 주셔서 그를 만나 주셨다. 너의 손가락을 내어 나의 옆구리에 넣어보라 말씀하셨다. 마침내 도마가 의심과 회의를 넘어서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게 만들어주셨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신앙을 온전히 회복한 도마는 저 멀리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피끓는 젊음을 순교의 제물로 바쳤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의심과 회의를 넘어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그리고 영광스런 순교로 그의 삶을 마쳤다.


의심과 회의에 빠졌던 도마를 붙잡아주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붙잡아 주신다. 의심과 회의, 고난과 시련속에서 주님 어디 계십니까 탄식하고 절망할 때 소망의 주님으로 인해서 일어서기를 원한다면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손을 꼭 잡으면 우리를 만나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