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의 길에서 만난 부활의 주님
200412 주승중목사님
(누가복음24:13~16)
그 날에 그들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아야기하더라....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누가복음24:25~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게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누가복음24:32~35)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제일 먼저 한 인사가 "평강할지어다"라는 인사였다.
우리가 예배당에서 예배드리지 못한 것이 2/23부터 오늘이 50일째이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던 그 마음이 생각난다. 그 50일동안 하나님께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 못하면서 슬픔의 나날을 보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 이렇게 모여 기쁨의 예배를 드린다.(일만8천 교인중 80명x10교구 참석)
초대교회에서의 기쁨의 예배처럼 오늘부터 5/30 성령강림주일까지 기쁨의 50일을 보내기 위해 코로나19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위한 재래시장 온누리 상품권1만원권을 성도님들의 5만원 상당 영수증에 보은 사용하기로 하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러시아의 국민 작가인 푸쉬킨의 詩이다.
푸쉬킨의 일화를 소개한다.
추운 겨울 푸쉬킨이 모스크바 광장을 지나는데 시각장애인 거지를 만난다. 한겨울인데도 얇은 누더기 옷만 걸치고 있다. 광장 한켠에 움추리고 떨고 있다가 사람이 지나면 한푼 줍쇼 얼어죽게 생겼습니다 구걸한다. 푸쉬킨에게도 똑같이 구걸하는데 푸쉬킨이 대답한다. 나 역시 가난한 형편인지라 그대에게 줄 돈이 없다 대신 글자 몇자를 써주겠소 그걸 몸에 붙이고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길겁니다 한다. 그 글을 써서 거지에게 주고 몇달이 지난 후 푸쉬킨이 다시 모스크바 광장에 나왔는데 그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알았는지 손을 내밀어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선생님 목소리를 들으니 몇달전에 글을 써준 분이시군요. 그 글을 몸에 붙였더니 구걸이 잘 되었습니다. 푸쉬킨이 빙그레 웃자 걸인이 묻는다. 그 날 써준 내용이 무엇이었나 하니 별거 아닙니다. "겨울이 왔으니, 봄도 멀지 않으리라" 그리고 다시 펜을 꺼내어 그 글 밑에 새로운 글을 하나 더 써준다. "봄이 왔으니 이제 모든 인생마다 꽃이 피리라"
모스크바 광장을 지나던 사람들은 이 걸인이 붙인 글을 보고 생각한다. 지금은 비록 어려운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저 걸인은 희망을 잃지 않았구나 인생의 꿈을 잃지 않은 이 사람을 도와줄 필요가 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 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가.
인간은 무엇보다도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세계적 사회심리학자 "소유냐 존재냐"를 쓴 에리히 프롬은 인간을 "호모(인간) 에스페란스(희망)" 즉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라 한다. 우리 인간은 희망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은 희망이 있으면 현재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미래에 희망을 잃어버릴 때 살았으나 죽은 사람이 되고 만다. 소망을 잃어버리면 죽은 존재와 같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이 등장한다. 엠마오의 두 제자로 알려진 사람들이다.
모든 희망을 포기한 채 실망과 절망의 길을 걸어가는 두 제자가 등장한다. 본문 18절에 그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라고 되어있다. 또 한 사람은 많은 성경학자들의 말로는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 일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옆에 서있던 여인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데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요한복음 19:25에서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말슴한다.
따라서 엠마오로 돌아가던 글로바와 또 한 사람의 제자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라고 말한다. 마가의 기록에도 보면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모습을 바라본 여인중 한 사람이었다고 증거하고 있는데 마가는 그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더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마가복음 15:40 "멀리서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요한복음 19:25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다"고 말씀한다.
두 본문을 보면 골고다 언덕에 있었고 예수님의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는 것을 보았고 십자가가 미리 파놓은 구멍에 쿵 하고 세워지는 것도 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았고 낮12시에 온 땅에 신비스러운 어둠이 임하는 것도 보았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는 예수님의 음성도 들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이 찔리는 것도 보았다. 결국 그녀는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그러한 사실들의 일부를 목격했을 글로바 역시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이 모든 광경들이 그들에게는 충격이요 절망이었다. 그들의 희망은 일순간에 모두 무너져내렸고 삶의 의미도 모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글로바 부부를 포함해서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이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참담한 실패와 절망 그 자체였다. 이제 그들은 그 절망을 안고 슬픈 기색으로 고향인 엠마오로 향한다. 바로 그 실망과 절망의 길에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수님이신줄 알아보지 못했다.
누가복음 24:16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우리는 의문이 생긴다.
어떻게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는데 그 예수님을 못알아본단 말인가.
성경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했지만 가장 설득력있는 대답은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세상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문 16절에서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라고 나와있는데 그들의 마음의 눈이 자신들의 이기적인 생각과 욕망으로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묻는다.
"너희가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이에 글로바와 마리아가 슬픈 빛을 띠고 대답한다. 누가복음 24:19,21에서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 말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생각과 소망이 무엇이었는가를 알게 된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구속하는 메시야를 바랐다. 그들이 바랐던 구속은 다른 종류의 구속이었다.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구속으로 생각했다. 예수님은 그들을 죄로부터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그들이 바라고 소망했던 것은 죄로부터의 구속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의 세상적인 욕망, 정치적인 해방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소망했다.
결국 사람들이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있는 한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다.
엠마오로 돌아가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세속적인 욕망을 기대하며 따랐는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너무나 힘없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절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욕망에 눈이 가리어지고 그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서 부활하신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자신들의 묙망과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자신들의 욕망대로만 생각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듣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불신앙에 빠지는 것이다. 불신앙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또 하나의 대답이다.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슬픔 가운데 지냈다.
안식후 첫날이 되었을 때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고자 무덤으로 달려간다. 마가복음 16:1~2에서 기록이 나온다. 거기서 그녀는 천사를 만났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으로 달려가서 보고 돌아와 글로바와 마리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천사를 본 것을 얘기한다. 자신들이 빈 무덤을 본 것을 말한다. 글로바와 아내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천사를 통해 들었고 제자들에게서 다시한번 듣는다.
누가복음 24:22~24말씀이다.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를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사람이(베드로와 요한)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글로바와 마리아는 이 모든 사건을 보았고 들었다. 하면서도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말한다.
여전히 불신앙이 담겨 있었다. 못믿겠다는 얘기이다. 그런 말은 했는데 무덤은 비었는데 예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인간적인 기대와 욕망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빈 무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자신들의 기대와 소망이 무너져 내렸다는 실망과 절망감에만 사로잡혀 계속해서 부활의 소식을 천사를 통해 또 제자를 통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소식, 그 진위를 알아볼 생각도 없이 예루살렘을 떠나고 말았다.
자신들의 이기적인 생각과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들의 욕망과 생각대로만 듣는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듣는다. 듣고싶은 말만 듣는다. 하나님의 말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불신앙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고 말씀한다. 절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있었고 절망할 이유가 도무지 없었다. 본문 27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죽음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사도행전 22:23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따라 이루어진 예언의 성취였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고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었고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었고 수치가 아니라 영광이었다. 절대로 슬퍼하거나 절망할 일이 아니었다.
누가복음 24:25~26에서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안타깝게 말씀하신 것이다. 기뻐해야 하는데 슬퍼하는 신앙의 괴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의 신앙의 괴리가 우리 가운데도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내 속에서도 그런 모습이 발견되고 있지 않는가. 우리들도 우리 욕망과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우리의 눈이 가리어져서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채 나는 마치 고아처럼 버려졌다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실망하고 있지 않는가.
부활의 영으로 우리의 모든 순간마다 함께 하시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동행해 주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엠마오의 두 제자들처럼 실망하고 절망하고 있는 우리는 아닌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도 우리는 그 음성을 듣지 못한채 예수는 보지 못하였노라고 의심하고 있지는 않는가.
삶의 어려운 상황만을 보느라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오히려 실망 가운데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원하는 말만 듣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가운데 살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다. 또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까지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지 않으신 것이 무엇이겠는가. 아무 것도 없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2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말씀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주의 종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 내 욕망과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내가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거나 불필요한 실망가운데 빠져서는 안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있으면서도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과 실망 가운데 있다면 우리 주님을 더디 믿는 자라고 탄식하게 만드는 우리의 안타까운 모습일 것이다.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과 불신앙에 빠져 부활하신 주님도 못알아보고 그 말씀도 깨닫지 못했던 엠마오의 두 제자들을 무엇이 변화시켰는가.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경말씀을 풀어주심을 통해서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떼어주심을 통해서이다.
누가복음 24:27에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모든 것이 깨닫게 되어졌다고 본문 32절은 말씀한다. 성경 말씀의 설명을 듣게 되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27절에서 "모세(율법/토라 즉 창출레민신)와 모든 선지자의 글(예언서/네비임 즉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시엘 등 12소선지서)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성문서/케투빔 즉 시편 잠언 욥기 등..)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 즉 구약의 모든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음을 말씀한다. 모든 말씀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고 감동과 확신과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또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찬을 베푸심으로 영의 눈을 열어주셨다. 누가복음 24:30~31에서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말씀한다. 여기서 떼어라는 것은 찢다는 뜻인데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찢어진 것을 표현하는 정확한 그 단어이다. 사도행전 2:42에서 초대교회가 성찬식할 때 사용했던 단어 찢다, 떼다라는 단어와 동일하다.
포도주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2천년전에 유대인들의 관습상 포도주는 떡과 항상 함께 있었기 때문에 구지 표현하지 않았다.
30절에서 성찬식의 정확한 4가지 행위를 말씀하는데 가지사(Take) 축사하시고(Bless) 떼어(Break) 주시니(Give)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하나님의 말씀은 3가지이다.
먼저, 기록된 말씀인 성경(Written Word of God)
둘째, 선포된 말씀인 설교(Spoken Word of God)
세째, 눈에 보이는 말씀인 성찬(Visible Word of God)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모든 공예배를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에 보이는 말씀인 성찬에 더많이 참석해야 한다.
오늘 코로나로 인하여 부활주일 성찬식을 갖지 못하지만 시간을 두어 성령강림주일에 성찬식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계속해서 읽고 선포된 말씀인 설교를 듣고 성찬식을 참여할 때 기록된 말씀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선포된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의 마음이 또다시 뜨거워지게 될 것이고 성찬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과 하나되어 우리의 영의 눈이 활짝 열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깨닫고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실망과 절망에서 벗어나 부활하신 주님으 ㅣ참된 소망으로 일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엘리자베스 페이슨 프란티스, 그녀는 목사인 죠지 루이스 프란티스와 결혼하여 목사 사모가 되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자연적으로 밖에서 사람을 만나기 보다는 조용히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조용히 묵상하며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시를 써서 신앙을 고백하고 발표했다. 결혼한지 11년째 1856년 어느날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에 의해 사랑하는 두 자녀를 한꺼번에 잃는다. 삶의 희망이 사라졌다.
아이들의 성장을 기쁨으로 살아왔는데 원래 몸이 약한데 마음의 병까지 얻어 고통과 절망 가운데 놓였다. 목사의 사모가 아니었다면 스스로 목숨끊는다는 순간도 여러번 있었다. 실망과 좌절 중에 목사님이 그녀에게 말한다. 우리가 성도들에게 늘 말씀을 가르치며 설교하던 순간이 우리에게도 왔구려. 성도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으라 했던 그 순간 말이요.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실천해야 할 순간이 왔구려. 우리가 다시한번 말씀으로 일어납시다. 사람하는 남편의 위로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얻은 그녀는 다시 일어선다. 성령님의 감동을 따라 시를 쓰게 되었는데 그 시가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이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두 자녀를 잃고 절망속에서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했다.
엘리사베스 그녀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되기를 원한다.
삶의 시련과 고난으로 상실감과 암흑속에 있다면, 나의 소망과 계획이 틀어져서 낙심 가운데 있다면, 인생의 실패와 좌절로 인해서 마음의 문이 닫혀 있다면, 코로나 사태로 인한 두려움과 여러가지 근심 걱정 가운데 놓여있다면 우리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실망과 절망으로 엠마오로 돌아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세히 설명하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자세히 설명하시기를 원한다.
우리도 이기적인 생각과 욕망 다 내려놓고 부활하신 주님 앞에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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