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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주승중목사님

200409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00409                                            주승중목사님


(누가복음 23:27~31)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우리는 지금 비아돌로로사,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기도한다.

오늘은 8번째 처소에 대하여 알아보자.

제8처소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실 때 울면서 뒤를 따르던 많은 여인들에게 말씀하신다. 본문 말씀이다.


제8처소의  사진에는 작은 십자가 돌판에 "니카"라는 글이 쓰여져 있다. '승리했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승리한 사건이다.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이 말씀은 골고다 길을 따르던 백성들과 여인들의 큰 슬픔을 묘사하고 있다.


누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두 종류의 사람을 묘사하는데 하나는 백성들이요 또 다른 하나는 여인들이었다.

누가가 두 종류로 분류한 이유는 그들이 십자가를 따르는 이유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백성들은 단지 구경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모였을 것이고 여인들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예수님을 위해서 가슴을 치며 슬퍼하며 울었기 때문이다. 가슴을 친다는 것은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뜻하는 단어이다.

여인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사역에 함께 다니며 예수님을 섬겼던 여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또 어떤 형태로든지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여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가 여자의 큰 무리라고 표현한 것은 예루살렘의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던 듯 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슬피 울며 따라오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신다.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누가복음 23:29에서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즉 자녀를 갖지 못한 여인을 3중으로 표현하는데 그들이 오히려 복이 있다 말씀하신다. 그 당시 여인들이 자녀를 갖지 못하는 것은 저주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앞으로 예루살렘에 임할 멸망의 날에는 차라리 자녀가 없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23:30에서는 '사람들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에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이 뜻은 앞으로 닥쳐올 재난이 너무나도 비참하기에 차라리 산에 묻혀 죽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엄청난 고통이 다가온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누가복음 23:31에서는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오 말씀하신다. 여기서 푸른 나무는 수액이 가득찬 나무로서 죄가없으신 예수님을 의미한다. 대조적으로 마른 나무는 영적으로 시들어 메마른 불의한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죄 없으시고 의인인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난을 당하는데 하물며 죄 가운데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에는 그 고통이 어떠하겠는가 하는 말이다.


결국 예수님이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이 말씀은 장차 그들에게 임할 재앙과 심판이 너무나 가혹한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결국 유대인들의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말씀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실제로 로마 틱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주후 70년에 함락당했다.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철저한 파괴와 살륙은 전무후무한 대환란이었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전쟁기'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로마의 창과 칼에 죽었고 심지어 로마가 몇년간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 굶주림에 지친 부모들이 아이들을 잡아먹는 비참한 일도 있었다고 기록한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비참한 운명을 미리 보셨고 우시며 말씀하신 바 있다.

누가복음 19:44에서 '또 너와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라.' 즉 심판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시고 여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너희가 나를 위하여 울 때가 아니라 바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 때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예언은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종말에 다가올 심판을 의미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즉 역사의 마지막 때 회개하지 않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인데 그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고 울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환란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가에 대하여 예언하셨다.

마태복음 24:15~27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그 날에는 아이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겠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으로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질 대환난의 날에 심판과 멸망을 당하지 않는 자들이 되도록 회개하며 울며 기도하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과 세상의 죄를 회개하며 울어야 한다.


가깝게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졸말적으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는 자들이 심판때에 맞이할 엄청난 슬픔과 비극을 미리 보신 것이다.

자신들이 받을 심판을 알지 못한채 예수님의 죽음만을 슬퍼하는 여인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다. 물론 여기서 예수님을 위해 우는 여인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을 보고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가슴을 치며 우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 위에서 여인들이 보지 못한 측면을 일깨워주시는 것이다. 메시야를 죽인 유대인의 죄악과 그로 인해 장차 임할 재앙을 생각한다면 눈물이 아니라 두려워 떨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예수님을 동정하며 울고 있을 때만 아니었다.


오늘날도 많은 성도들이 고난 주간이 되면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에루살렘의 여인들이 보였던 슬픔과 눈물처럼 가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예수님이 왜 그런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고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생각하면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슬퍼서 우는데서 그칠 수가 없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메시야로서의 고난과 죽음이었고 죄인들을 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울어야 한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안타까워 우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를 죽일만큼 심각한 우리의 죄를 생각하며 울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죽어야 할 정도로 우리의 죄가 심각함을 깨닫고 울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고난주간에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하고 애통하며 울어야 한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탄식하고 울어야 할 진정한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이 슬퍼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죽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죄악 때문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찔림은 우리를 위한 찔림이고 예수님의 사망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 자신과 세상의 죄악에 대하여 진정 가슴치며 회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19로 인해 역사상 가장 슬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참회의 기도를 드려야 하나. 거창하게 인류의 죄를 언급할 수도 있다. 약한달전에 높은뜻덕소교회의 오대식목사의 참회의 기도같은 겸손하고구체적인 회개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주님, 코로나19로 인해 불과 한달새 우리의 생활 모든 것이 너무나 많이 바뀌었습니다. 요즘 상황을 보면서 우리가얻을 수 있는 교훈이 분명 있음을 보게 하시고 우리가 잘못 가고 있었던 길을 반성하며 다시금 주 앞에 바르게 서는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우리는 지금 평범한 잇앙이 다시 오기를 간구합니다. 매일매일의 일상이 가장 큰 축복임을 이제라도 알게 하시니 감사드리며 그동안 주님이 주신 행복을 곁에 놔두고 행운을 찾아 헤맸던 죄를 용서하시며 무엇이 가장 소중한 축복인지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한국인 입국을 막는 나라가 현재 80개국이 넘었습니다. 주님, 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나치리만큼 해외여행을 다니는 한국인에게 이제는 좀 절제하라는 주님의 사인같이 느껴집니다.

남들과 관계없이 나만 즐기면 된다는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들을 이제는 바꿔주시고, 어려운 이웃에 대한 공감과 나에 대한 절제가 조금 더 삶에서 많이 나타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동남아와 중동국가들, 그리고 아프리카 나라들까지도 한국인을 무시하고 강제 격리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동안 한국인들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을 무시해 온 것에 대한 인과응보같이 느껴집니다. 앞으로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더욱 인격적으로 대하게 하시고 소중히 여기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마스크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 동안 너무 많이 무책임한 말을 내뱉고 거짓 뉴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퍼날랐던 우리들에게 조금 더 침묵하며 살라는 주님의 명령같습니다. 앞으로 조금 더 내 입을 막으며 적게 말하고 진실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모이는 교회를 막으시는 것은 그 동안 한국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전혀 감당하지 못한채 자기들끼리 모이는 일에만 힘쓴 것에 대한 벌처럼 느껴집니다. 우리의 믿음의 현장이 교회가 아닌 세상임을 알려주시는 주님의 교훈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교회보다 교회 밖에서 더 빛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우리가 모두 다시 노력하게 하여 주십시오.

교인이 5만이니 10만이니 하는 것이 모두 거품인 것을 알게 하신 주님, 하루 아침에 예배당의 교인들은 없어질 수 었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목사의 관심이 교인의 수에만 있고 교회의 자랑이 그 크기에만 있었다면 이제 그 마음을 돌이켜 우리의 참된 자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자랑이 천박한 '교회 크기'가 되지 않게 하시고, 내 기도의 간구가 경쟁에서의 승리가 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오직 존귀한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자랑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이 어려움이 다 지나고 난 후, 이 땅의 교회들이 다시 새로워지며 주 안에서 하나의 교회로, 같은 교회로, 함께 천국을 향해 나가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와 같이 거룩한 공교회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텅빈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 동안의 나의 잘못을 참회합니다.

주님, 교인들과 함께 마주하며 예배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도록 주님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언제나 우리를 위로해 주시며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또한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울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은 가깝게 주후 70년에 일어날 예루살렘의 함락과 그 때 여인들과 그 자녀들이 맞이하게 될 비극을 미리 보시고 그리고 멀게는 최후의 심판 때에 죄 가운데 있는 인류가 당할 하나님의 진노를 바라보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신 그 때를 기억하라. 반드시 심판주로 오신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1:8에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나."

세상 마지막 날, 메시야를 죽인, 마른 나무같은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불못에 던져져 영원한 멸망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다가올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생각하며 나 자신과 우리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야 한다. 내 형제자매들 내 가족들 우리 이웃과 우리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야 한다. 점점 더 쾌락과 음란과 죄악 가운데 물들어가는 이 시대의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심판의 슬픔과 구속에서 벗어나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길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24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는 없다. 우리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재물이나 부모가 누리던 권력과 지위가 아니다. 부모의 경험과 지식이 아니다. 부모가가진 부동산과 수억이 들어있는 통장이 아니다. 결코 그런 것들은 최후의 심판날에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에 순식간에 잿더미가 될 뿐이다.

우리가 우리 자녀에게 물려줘야 할 것은 영생의 유산이다. 오직 예수님을 통한 영생의 유산이다. 이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회심과 구원을 위하여 30년이 넘도록 기도했다.

어느 날 너무나 지치고 실망 가운데 있을 때 그녀가 존경하던 신부 안부르시우스는 말한다. "눈물로 기도한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계속하여 눈물로 기도했고 결국 어거스틴은 돌아와 초대교회의 위대한 선배가 되었다.


세상은 타락하고 자녀들에게는 유혹이 많은 세상이 되었다.

이번 N번방 사건으로 우리 사회가 이렇게까지 타락한 것을 보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이 말씀이 오늘 우리 부모된 자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이다. 기독교 교육 전문다 오인숙 박사의 호소가 있다.

'이제 크리스천 부모들은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울 대가 되었다. 가정이 무너져가고 아이들의 마음이 황폐해져 거리를 떠돌고 있다. 일부라 할지라도 초등학교 아이들조차도 담배를 피우고 거침없이 욕설을 하는가 하면, 음란물과 인터넷 중독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무서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자녀들 속에 깊이 파고드는 물질 문명의 소산들을 외면하기에는 그 탁류가 너무나 거세다. 이 시대는부모들의 눈물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우리 아이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오닝숙 박사의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에서.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