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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주승중목사님

200407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200407                         주승중목사님


(마가복음 27:11~26)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예루살렘 도심에 구 예루살렘 성이 있다. 올드시티, 구도시라 불린다.

그 안에 "비아돌로로사"라는 길이 있다. 라틴어로 슬픔의 길, 고통의 길이라는 뜻이다. 빌라도 법정이 있었던 안토니아 요새에서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신 길이다. 약600여M의 십자가의 길이다. 예루살렘 옛 성터의 지도이다.


이 길에 십자가의 14개 처소가 만들어져 있고 각 처소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깊히 묵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오늘 그중 2개 처소에 대하여 말씀을 나눈다. 1처소는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은 곳이고 두번째 처소는 십자가를 지고 출발한 곳이다.

1,2처소는 서로 마주보고 있고 그 사진과 동영상이다.


현재 안토니오 요새 안에 있었던 빌라도의 법정 1처소는 현재는 아랍인 학교로 사용하여 평일에는 들어갈 수 없다.

그 안의 내부 모습의 사진이다. 빌라도 법정의 모습이다.


매주 금요일 오후 십자가의 행렬이 시작된다.

그 맞은 편 건물이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고 십자가를 지고 출발하신 곳이다. 그곳 오른쪽에 채찍교회가 있고 왼쪽에 선고교회가 있다.

채찍교회와 내부 사진.

그리고 선고교회의 내부사진이다. 그곳에 선고받으시는 예수님과 슬퍼하는 모친 마리아와 요한의 조각이 있다. 그리고 1,2 지점에 있었던 사건을 상세기 기록하여 있는 내용이 오늘 읽은 말씀이다.

당시 산헤들린 공회에서 예수님의 죄명은 신성모독죄였다. 로마 식민지 치하에 있었던 그들은 판결과 집행권이 없었기에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을 넘기신 것이다. 산헤들린 공회가 로마 총독에게 넘길때에는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을 지칭했다. 정치범으로 고소한 것이다. 신성모독죄는 로마에게는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에게는 신성모독죄로, 로마에게는 정치적 반역죄로 몰려 재판받은 것이다.

이 재판에서 빌라도는 그 어떤 죄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비겁한 판결을 하고야 말았다. 유대에 파견된 총독으로서 유대의 폭동을 막고 유대 지도자들과의 갈등을 피하고자 결국 불의와 타협했고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다. 그래서 빌라도는 우리가 매번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는 문구에 등장하게 되었고 지난 2천년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오늘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제목을 가지고 함께 생각하고 기도한다.

예수님은 결국 본디오 빌라도의 명령에 의해 십자가 형에 처해진 것이다.


빌라도는 당시 유대 지방을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이었다.

당시 로마는 전세계를 다스리던 제국주의 국가였고 로마의 황제는 그 넓은 지역을 다스리기 위하여 로마를 13지역으로 나누어서 각 식민지에 총독을 두어 다스렸다.  당시 로마 제국의 영토 사진이다.(가이사랴의 위치 표기?)

수리아 지역이 바로 유대 지역이다. 그곳을 다스리던 총독이 바로 본디오 빌라도이다.

유대 지방은 수리아의 한 부분이었고 빌라도는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수리아의 총독이었다. 당시 총독이 거하던 곳은 가이사랴였고 그곳에 수리아를 다스리던 로마 총독부 본부와 성채가 있었다. 사진은 가이사랴의 복원 사진이다.

지금도 가이사랴에는 총독부 본부 건물이 바닷가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바닷가에는 로마의 전차 경기를 하던 운동장도 남아있다.

빌라도가 총독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념비가 발견이 되었다.

그 당시 수리아의 총독부가 가이사랴에 있었는데 유대인의 소요가 있을 것 같다는 정보가 있어서 예루살렘으로 임시로 총독부가 옮겨와 머물고 있었는데 그 때에 예수님을 재판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한 상황과 그 교훈을 알아보자.

당시 로마는 총독을 내세워 식민지를 다스렸지만 그곳의 왕들을 허수아비로 세워놓았다. 각 민족이 로마를 향해 반기를 드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당시 유대를 다스리던 허수아비 왕 즉 분봉왕은 헤롯이었다. 허수아비 정권에 자치권을 주었지만 분봉왕은 반드시 로마 황제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먼저, 황제의 승인을 받아 임명했고, 둘째, 로마에 세금을 반드시 바쳐야 했다. 세째는, 개인에 대한 판결 즉 사형은 반드시 로마 총독의 권한에 두었다. 이 세가지 외에는 자치적으로 다스리는 것이 로마의 정책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은 당시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있었다. 따라서 대제사장 가야바는 빌라도에게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있었다. 그는 죄가 없지만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그를 죽이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노력했다. 더구나 그의 아내가 상스럽지 못한 꿈을 꾸고 빌라도에게 말한다. 좋지 않은 꿈을 꾸었으니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는 충고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세번씩이나 말한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느니라."(요한복음 18:38, 19:4, 19:6)


그런데도 그는 결국 폭도들에게 내어주었고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최종적인 명령을 내렸다.

왜 그랬을까.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님이 억울하게 죄가 없이 끌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인 야망이 컸던 사람이었다. 원래 로마의 상류 계급 출신이 아니었고 중류 계급이었다. 그가 당시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세번째 아내였던 클라우디아의 딸 '클라우디아 프록필라'라는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로마 첫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이기도 했다. 중류 계급이었던 빌라도가 로마 황실의 부마가 되어 로마의 총독이 될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주후 26년 수리아 지역에 총독으로 부임한 후 로마의 황제 숭배를 강요하다가 유대인들과 심한 갈등을 일으켰고 또한 로마 총독부가 있었던 가이사랴의 수문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그 건축 비용으로 유대인들이 성전에 바쳤던 성전세를 전용했다.

이 일로 인하여 유대 지역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로마 총독이 정치를 잘 하지 못한다는 소식이 로마 정부에 끊임없이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유대 지역에서 끊임없는 소요와 반란이 일어나는 것에 빌라도는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소요의 소식이 황제에게 들어간다면 자신에게 무능한 총독이라 찍혀 문책을 당할 것이 두려웠다.


유월절에 소요가 일어날 것이라는 첩보를 듣고 총독부를 임시로 예루살렘으로 옮겨와 있는데 예수님 때문에 엉뚱한 소요가 일어나게 생겼으니 그로서는 당황할 수 맊에 없었다. 대제사장 가야바를 비롯한 산헤들린 공회의 멤버들,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달려들자 그는 무력으로 진압할 수도 있었으나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 소요를 다스리기 위해 꾀를 낸다. 당시 유월절 때가 되면 죄인 하나를 풀어주는 관습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풀어주려 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은  일거에 무너지고 만다.

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이 바나바를 내어달라고 소리쳤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재판의 마지막 과정에서 손을 씻는 예식을 행하면서 나는 이 사람의 죄에 대하여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태복음 27:24) 하면서 폭도들에게 내어준다.

이 손을 씻는 예식은 신명기 21:6~7에 관련하여 어떤 사람의 죽음과 자신이 관련이 없다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예식이다.

유대 총독으로서 유대 풍습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던 빌라도는 유대 풍습을 이용하여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로마 총독으로서 사형 판결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권을 가진 그가 상징적 행동을 했다고 하여 예수님의 죽음과 결코 무관할 수 없고 그 책임이 무마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죄없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총독의 지위에 얽매어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먼저 생각하였기에 양심에 따른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군중들과 야합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우리들도 언제든지 이렇게 내가 먼저 살려고 할 때 나의 유익을 먼저 앞세울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된다는 사실이다.

신앙 양심을 잠재우고 불의와 타협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이 될 수 있다.  빌라도는 자신의 총독직을 잃을까 두려워서 양심을 지키지 못하고 불의와 타협하고 말았다.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였기에 의로운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부인했다.


그리하여 2천년동안 오고가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입을 통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고백을 듣게 되었고 또 앞으로도 주님오실 그날까지 수많은 성도들이 수많은 고백을 할 것이니 이보다 더 불명예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 우리들도 빌라도처럼 나의 작은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빌라도가 섰던 그 자리에 선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나의 유익, 나의 안전, 나의 욕심을 위해서 빌라도처럼 예수님을 외면하겠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주겠는가.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불의와 타협하고 우리의 신앙 양심을 버린다면 우리 주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내어주는 것임을 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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