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가려느냐
200405 주승중목사님
(요한복음 6:66~69)
....예수께서 열두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마가복음 8:34)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고난주일이다.
2천년전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찬송하리로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쳤다.
불과 나흘 뒤에는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다. 극적인 변절이요 변질이다.
왜 그렇게 되었나. 본문에서 찾아본다.
세상적인 인기와 성공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인기 정점은 어느 때였는가.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 사건 직후였다. 그 표적을 사람들이 보고 세상에 오신 선지자로 임금을 삼으려 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야로 생각했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이적과 기사를 행했다. 오병이어 직후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다.
남자들만 오천명을 먹였다면 약2만명이 모였을 것이다.
당시 갈릴리 인구는 10만~15만으로 추정한다. 20% 즉 5명중 한명꼴로 갈릴리에 살던 대부분 사람이 모였다. 갈릴리 사람들이 거의 모두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세상적 성공의 기준으로는 정점이었다. 요한복음 6:14~15에서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이 되려 오신게 아니라 구원자로서 오셨기에 제자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신다.
그런데 무리들중 일부가 가버나움까지 따라간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요한복음6:26~27에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을 하신다. 당시 따르던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목적은 자신의 이기심, 육신의 병고침, 배고픔의 문제, 그리고 잃어버린 나라의 회복을 위한 정치적 목적이었다. 즉 육신적인 필요와 세속적 만족 때문이었다.
이에 예수님은 썩을 양식이 아닌 영생의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하시며 생명의 떡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때부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수근거림이 다툼으로 변한다. 자신들의 목적과는 다른 말씀을 하시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육신의 떡과 음료에만 관심을 가졌던 그들에게는 요한복음 6:54~55에서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하신 말씀이 오히려 그들에게 걸림돌이 된다. 요한복음6:61에서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고 말씀한다. 어찌하여 사람의 몸을 먹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요한복음6:66에서 제자들 즉 당시에 따르던 사람들 중에서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말씀한다. 여기서 떠났다는 말은 버리고 갔다는 말이다. 세속적인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을 본다.
예수님을 떠나간 무리들과 끝까지 따르는 제자들이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을 떠나간 무리들은 '제자'라는 명목은 있었지만 실제는 이적과 기사, 치유, 먹는 떡 때문이었다.
병고침을 받기 위해,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즉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다.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서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을 통하여 잃어버린 나라도 되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4:23~25에서 "예수께서....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는 말씀은 갈릴리는 북쪽, 데가볼리는 동쪽, 요단강은 남쪽 유다를 말한다. 즉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예수님을 따랐다.
그것은 자신의 목적과 육신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교훈을 따르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자신들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주저없이 예수님을 떠났다. 예수님과 하나되고 예수님께 순종하고 예수님과 함께 살고자 하는 의지와 믿음이 없었다. 이것이 무리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메시야 즉 병들면 고쳐주어야 하고 배 고프면 먹여주어야 하고 포로로 잡히면 해방시켜 주어야 하고 기적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자기를 위해서 기적을 베풀 수 있는 메시야, 그 메시야를 만들어 놓고 그렇게 만든 메시야 예수가 자기들 뜻을 따르지 않자 자신들의 길로 돌아간 것이다.
66절의 "그 제자 중에"의 말씀처럼 겉으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지만 실지는 자기 중심적 무리들이었다. 선지자 요나의 회개하기 전의 모습과 같았다.
폭력적인 앗수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회개하라는 말씀의 선포를 거부하고 요나는 하나님을 의심했다.
하나님은 선민을 구원하고 이방인과 악인 즉 앗수르는 심판받아 마땅한데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다. 하나님의 명령과 정반대의 길로 간다. 결국 요나는 편협한 선민 사상과 이스라엘 백성만 사랑하는 하나님 형상을 스스로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이 모두 가지고 있었던 선민 사상이었다.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편협한 하나님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 하나님을 떠나기로 결정한 요나였다. 제자 아닌 제자로서 요나는 예수님 당시의 떠나간 무리들과 같았다.
우리는 그 무리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지만 어려움이 오면 떠나지 않는가. 내가 필요로 하는 하나님을 내가 만든 하나님으로 만들어놓고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 지니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님은 물으신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한다.
요한복음 6:68에서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베드로는 정확하게 대답한다. 물질이나 떡이나 치유나 정치적 해방이나 그 무엇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가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께만 영생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과연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누구인가.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붙잡고 따르는 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중심으로 삼고 순종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최우선으로 삼고 순종하며 자기 희생도 감수하는 사람이다.
마가복음 8:34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 말씀한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 생각 내가 원하는 것 내 고집 자기 계획을 내려놓는 것이다. 주님을 순종하고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 뜻 내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미국의 유명 설교가 카일 아이들먼의 "팬인가 제자인가"에서 '언제나 자신에게는 No라고 말하고 예수님께는 Yes라고 말하십시오. 자아를 부인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말한다.
예수님의 참제자가 되려면 내 유익을 내려놓아야 하고 예수님의 영생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7~9에서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말씀한다.
본 교회에서 여수산돌교회로 가신 한정희목사의 간증이다.
자신은 요나와 같은 부끄러운 적이 있었다 한다. 본 교회가 갈라져서 싸울 때 상처받아 많은 성도들이 떠나가고 교역자들도 1/4이상이 떠나갔다. 침몰하는 배와 같았다. 자신도 교회를 옮겨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분당의 교회 청빙공고가 나서 면접을 했다. 지원자 100여명중에서 대형교회 출신의 한정희목사님만 면접했다. 큰 사택도 주고 여건도 좋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라 생각하는데 면접후 마음이 불안하고 잠을 잘 수도 없이 혼란스러웠다. 일상의 삶을 살기가 힘들었다. 기도도 안되었다 한다. 일주일이 지나고 새벽기도를 하는데 "네가 요나다. 너도 가려느냐"라는 음성이 들린다. "목사님도 기회가 되면 양들을 버리고 가실겁니까"하는 어느 권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수만명의 교회에서 한사람의 부목사가 떠나가도 흔적은 없다. 하지만 결국 분당에 가서 올 수 없다 하면서 당시 야단도 많이 맞았다. 시간이 흘러 주목사님이 오시고 교회가 치유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한다. 사역지를 옮길 수 있었고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지만 몸된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무리인가 아니면 제자인가.
한국 교회가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어려움이 있다. 지금도 영상예배를 드리지만 한시적인 것이지 기본이 아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이전으로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 30% 이상이 줄어들 것이라 말한다.
한국 교회 안에 알곡과 쭉정이가 드러날 것이다. 한국 교회를 흔들어 쭉정이가 떠날 것이라 한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참된 제자의 길은 영생의 말씀이 계심에 주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워도 내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고난주일을 맞으며 우리에게는 두가지 길이 놓여있다. 무리의 길과 제자의 길이다. 무리의 길은 넓고 편한 길이요 제자의 길은 좁고 힘든 길이다. 손해보고 고통스러워도 영생의 길을 걷는 우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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