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200410 주승중목사님
(요한복음 19:23)
군인들이 예수를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속옷도 취하니....
(마가복음 15: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마태복음 27:27~31, 50)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성 금요일이다.
비아돌로로사 10, 11, 12번째 처소, 이 세곳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 언덕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오는데 무덤교회가 세워져 있다. 무덤교회에서 예수님 못 박히신 곳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영상이다.
계단을 올라가면 10번째 처소가 나오는데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긴 곳이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한 곳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수치스런 일을 당할 때 억울해 하고 부끄러워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된 인간들 앞에서 당하신 수치를 생각하면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은 아무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당하신 수치를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그 다음 11번째 처소는 로마 군병들이 십자가에 눕혀놓고 못 박은 곳이다. 그 옆이 12번째 처소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 즉 십자가를 세운 골고다 바로 그곳이다.
12번째 영상을 다시 보자. 십자가를 세운 곳이다.
그리고 영상이다.
우리는 늘 예배할 때마다 사도신경을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다"라는 고백을 한다.
십자가의 죽음은 비참한 죽음이다. 그 당시 십자가는 극악한 죄인을 매다는 형틀이었다. 십자가는 죄인에 대한 형벌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지셨다. 죄없는 예수님께서 죄값을 치루느라고 십자가 형에 처해진 것이다.
누구의 죄값 때문이었나.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속죄"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형 판결 후 예수님께 채찍을 가하도록 했다. 그리고 로마의 군병들은 총독의 관정으로 끌고가서 온 군인들이 보는 자리에서 조롱하고 모욕했다.
마태복음 27:27 본문을 보면 온 군대를 모았다는 말씀이 있는데 군대 "레기온"은 당시 로마의 한 군단을 말하는데 6천명을 말한다. 본문에 나오는 "스페이라"는 그 1/10인 600명의 보병을 뜻한다.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둘러싸여서 조롱을 당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옷을 벗긴 후에 홍포를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린 다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라고 조롱했다. 그리고 얼굴에 침을 뱉고 머리를 갈대로 때렸다. 그리고 예수님께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해서 골고다 언덕까지 가게 했다. 그리고 골고다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그 순간은 사탄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섭리와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이 십자가의 사건은 참으로 비참한 사건이었지만 그 때 이루어진 하나하나가 그 어느 것도 의미없이 이루어진 것이 없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대속의 사건들이었다.
우리는 그 골고다 언덕에서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기도한다.
먼저, 채찍 맞으심의 의미이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께 잔인한 매질을 가했다. 당시 십자가에 처해질 사형수에게는 납과 못, 그리고 동물의 뼈가 주렁주렁 달린 채찍에 맞는 것이 관례였다. 채찍을 후려치면 채찍이 사람의 몸을 휘감아돌고 그 끝이 살점을 깊숙히 파고든다. 그리고 채찍을 끌어당기면 깊숙히 박힌 납덩이와 뼈가 살점을 뜯어내어 그곳에서 피가 터져 나온다. 때로는 가죽으로 된 채찍이 옆구리를 휘감아돌아서 그 끝이, 못과 납덩이가 옆구리에 박히면서 맞는이의 창자가 쏟아져나오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채찍을 맞은 죄수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지기 전에 이미 초죽음이 되었다. 그 내용은 영화 '패션 오브 크리스트'에서도 채찍맞는 장면들이 나온다. 살점이 떨여져나가 갈비뼈가 보인다.
예수님은 이러한 채찍을 무수히 맞았다.
유대인의 법에는 40대 이상은 때리지못하게 되어 있지만 로마에는 그런 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군병들은 예수님께 잔인하게 채찍질을 가했다. 왜 예수님은 저렇게 잔인한 채찍질을 당해야만 했는가. 그것은 바로 나와 우리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사야는 채찍질 당하실 것을 먼저 예언했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결국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그 몸이상하게 된 것은 나와 우리의 죄악 때문이고 나와 우리가 맞아야 될 채찍을 주님이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게 된 것이다.
그 다음에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었다.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속옷까지 다 벗기었다. 그리고 군병들은 겉옷과 속옷을 다 나눠가졌다. 그들이 예수님의 옷을 사람들 앞에서 벗긴 것은 예수님께 수치감과 모멸감을 주려는 목적이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아니 하나님 그 자신이 티끌에 지나지 않는 인간들에 의해서 그 옷을 발가벗기는 수치를 당하신 것이다. 도저히 있어서는 안될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런 수치를 당하셔야 했는가. 바로 나와 우리를 위해서이다.
우리의 죄로 인한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발가벗은 수치감은 언제 우리에게 왔는가. 창세기 3장에서 타락한 인간이 처음 등장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후에 우리에게 들어온 수치감이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의 죄를 범했을 대 그들은 자신들이 벗은 줄 알게 되었고 무화과 잎으로 그들의 벗은 몸을 가렸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벗었음으로 두려워하며 숨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인간들은 이 때 죄로 인한 수치심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한 허물을 가려주시기 위해서 벌거벗김을 당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벌거벗음의 수치는 바로 나와 우리의 죄로 인한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다함없는 사랑이었다.
이 죄로 인한 수치를 가림받았던 대표적인 사람은 다윗이다.
다윗은 밧세바로 인해 지은 죄로 인한 수치를 가림받고 그 은혜가 감사하여 고백한다. 시편 32:1"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죄로 인한 고통이 극심했다. 그는 종일 신음했고 그 뼈가 쇠할 정도로 고통 가운데 있었다. 마침내 죄사함을 받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했는지 모른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7~8에서 "불법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말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한 수치와 허물을 사해주시고 가려주시려고 친히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수치와 모욕을 당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 가려짐의 사랑과 은총을 받고 성도가 된 것이다.
그리고 군병들은 예수님의 오른손에 갈대를 들려주었다.
갈대는 보좌에 앉은 왕의 홀 즉 지팡이를 의미한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께 또 한번의 수치를 주기 위한 것이다. 갈대를 오른손에 쥐어줌으로 예수님이 아무런 능력과 힘도 없으면서 유대인의 왕으로 지칭한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조롱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놀림을 받으실 분이 아니었다. 그는 만왕의 왕이시고 만유의 주이시고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의 죄인들을 모두 심판하러 다시 오실 심판주이시다.
그 때가 되면 세상의 모든 왕들도 그를 조롱하던 자들과 그를 찌른 자들도 다 예수님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들은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증언한다. 요한계시록 1:7 "볼찌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그러므로 우리는 만왕의 왕 예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있을 것인데 그 때 왕의 홀을 쥐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를 인정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왕자와 공주로 서게 해 주실 것이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웠다.
원래 면류관은 왕관을 의미한다.그리고 운동경기장에서 우승자에게 주는 최고의 명예이다. 그러나 군병들은 금면류관 대신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조롱했다. 그리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얼굴에 침을 뱉고 손에 쥐었던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시면류관을 쓴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의 왕들은 머리에 여러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면류관을 쓰고 평안히 앉아서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다. 그리고 백성에게는 노동과 고통과 아픔을 주었다. 이북의 독재자 김정은처럼 백성을 착취하고 노예로 부리고 백성은 자신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여긴다.이것이 세상의 왕들이 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저주의 가시관을 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쓰라린 고통과 아픔을 감당하셨다. 그리고 믿고 따르는 백성들에게 구원과 참된 평화를 주셨다. 이 사실을 바울은 갈라디아서 3:13에서 증언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이 저주의 가시면류관도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아 생긴 것이다.
(창세기 3:17~18)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가시덤불은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의 결과 이 땅에 생겨난 저주의 열매였다. 결국 우리가 써야 할 저주의 가시관을 대신 쓰심으로 우리는 저주가 아니라 속죄의 면류관, 구속의 면류관이 주어졌다.
오늘도 세상에는 우리를 찌르는 가시들이 많다.
우리의 가정, 직장에도 가시가 없는 곳이 없다. 만나는 사람마다 삶에서 상처로 인한 가시가 있어서 사람에게 찔린 상처들이 많다. 말로서 상대방의 마음에 가시를 찌르고 교회안에서 봉사하고 섬김의 일을 하다가도 가시에 찔려 고통스러워 할 때도 있다. 믿는 사람이든 안믿는 사람이든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가시에 찔린 상처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이러한 찔리고 상한 심령을 치유하시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리셨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의 허물을 깨끗하게 씻어주실 수 있다.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셨기에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우리를 치유해 주실 수 있다.
혹시 지금 가시에 찔려 아파하고 있는가.
그 아픔을 주님께서 아신다. 그리고 나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시다. 우리의 모든 상처를 주님께 올려드리자. 그리하면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상처를 씻어주실 것이다.
우리의 나음을 위하여 채찍질 당하셨고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해서 그 옷을 벗는 수치와 치욕을 당하셨고 우리를 심판에서 구원하시려고 그 손에 갈대를 쥐셨고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영생을 주기 위하여 가시관을 쓰셨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다함없는 사랑이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토록 사랑하셨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감사하자.
또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깨닫자.
나와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꾼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자.
또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내가얼마나 큰 죄인이었는가 생각하며 겸손하게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섬기는 삶을 살자.
일산 한소망교회 류영모목사님이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며 쓰신 글이다.
"지금 당신에게 가시가 있는가.
당신이 고난의 가시에 찔려 울고 있을 때 주님은 찾아와 말씀하신다.
'나도 통곡하고 울었노라'고
당신이 가난하고 배가 고플 때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40일을 금식했노라'고
당신이 입을 것이 없어 부끄러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십자가에 발가벗겨졌노라'고
당신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 때 주님께서말씀하신다.
'죄없는 나도 흉악범 취급을 받았노라'고
우리가 인생의 짐이 무거워 쓰러질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도 상처난 어깨로 십자가를 졌노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5에서 말씀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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