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에로의 회복
200426 주승중목사님
(요한복음 21:15~19)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외면하고 싶은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실패"라는 단어이다.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하지 실패하거나 넘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원하는 바와는 달리 실패하거나 종종 넘어진다.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는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거나 또는 주변의 상황 때문에 넘어질 때가 있다. 학생들은 입학 시험에 낙방하기도 하고 청년들은 사랑에 실패하기도 하고 어른들은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사업에 실패해서 넘어지는 때도 있다.
그러나 시험에 한번 떨어지면 실패한 것인가. 요즘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경제가 너무나 어려운데 우리가 직장을 잃어버리면 인생 낙오자가 된 것인가. 사업에 부도가 나면 우리 인생은 실패한것인가. 물론 세상적인 기준에서 보면 이런 것들이 실패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실패와 넘어짐에 대한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와 넘어짐 까지도 선용하셔서 놀라운 선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비록 실패가운데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좌절하기 보다는 그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가시는가를 바라보고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도 쓰라린 실패의 경험을 안고 좌절의 바다로 돌아간 제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수제자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들이다. 베드로는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그렇게 주님의 부름을 받아 담대하게 나섰다. 그 이후로 베드로는 3년동안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제자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하는 놀라운 고백을 통해서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기도 했다. 그리고 고난 주간 성목요일 예수님께서 오늘밤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것이라 말씀하실 때에는 마태복음 26:33 말씀처럼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또 26:35에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두번씩이나 장담하고 큰 소리를 쳤다. 그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치기도 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갔는데 자신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안뜰까지 따라가서 일의 결과를 확인하고자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했던 그 입술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했다. 그리고 세번째는 저주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주님을 부인하고야 말았다. 베드로의 처절한 실패였다.
그리고 가야바의 집 뜰에서 도망쳐나온 베드로는 닭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님 말씀이 생각나서 심한 통곡에 빠지게 된다. 자신이 큰소리 쳐서 장담했던 그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지키기는 커녕 오히려 저주하면서 주님을 부인했으니 그는 다시는 예수님 앞에는 설 수 없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다.
실패한 베드로, 그는 정말 넘어져도 아주 제대로 넘어진 사람이었다.
너무나 부끄러운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두번씩이나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인 갈릴리 바다로 내려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 좌절의 바다로 돌아간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다. 그 날도 베드로와 제자들의 실패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한마리도 잡히지 않아 실망가운데 있는 그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새벽에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과 떡을 준비하셔서 그들을 초대하시고 조반을 나누어 주셨다.
지금도 갈릴리 바다 북쪽에 가면 베드로 수익권 교회가 있다. 수익권이란 베드로에게 교회의 권위를 주셨다는 뜻이다.
(사진의 인물은 한용희목사이다)
(교회 내부의 모습인데 예수님께서 생선과 떡을 준비하시고 베드로를 불러서 조반을 드시던 그 바위이다.)
(그리스도의 식탁이라는 바위가 있는 베드로수익권교회의 내부 영상이다.)
바로 저곳에서 실패한 인생을 찾아오신 주님, 그리고 넘어짐 가운데 위로하시고 다시 일으켜주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몇번의 실패를 하였나. 감당하기 어려운 실패를 당했을 때 어떻게 그 실패의 경험들을 극복해 왔는가. 실패의 경험들을 지워버리려고 애써왔는가. 아니면 그 실패로 인한 상처와 열등의식을 숨긴채 살아왔는가.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다시 일으켜주시고 마침내 진정한 사명자로 세워주신 예수님의 사역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실패의 자리에도 오셔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역사를 경험하기를 원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넘어진 자를 붙잡아 세워주시는 세가지 모습 세가지 방법을 찾아보자.
예수님은 실패의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이다. 우리는 실패한 장소나 그 일에 대해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고 회피하거나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실패한 일에 대하여 생각조차 하고싶지않아 한다. 누군가가 과거의 실패 이야기를 하면 듣기 싫어한다. 자신은 다 잊어버렸는데 왜 생각나게 하느냐고 화를 낸다. 그러한 것은 아직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정말 과거의 실패를 다 잊었다면 화를 낼 이유가 없다. 화를 내거나 꺼려하고 있다면 아직 실패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실패한 경험을 회피하거나 애써 잊으려 하는 소극적인 태도는 결코 그 실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베드로와 그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도망쳐나와 갈릴리 호숫가에 있다. 그들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한마디로 실패의 장소였다. 예수님 잡혀가시던 그날 밤에 다 도망치고 원수들이 무서워서 다락방에 숨어지내던 곳이었다. 더구나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던 장소 그곳이 예루살렘이었다. 그래서 그 실패의 장소를 떠나서 갈릴리 호수에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도망친 그 곳까지 찾아오셨다. 그리고는 베드로와 제자들을 초청하셨다. 그런데 그 초청하신 장소의 셋팅을 보면 참 의미심장하다.
먼저 3이라는 숫자가 여러번 등장한다. 요한은 요한복음 21:14에서 이 사건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세번째 나타나실 때라고 기록한다. 예수님은 마가의 다락방에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이미 두번 나타나셨는데 처음엔 도마가 없었을 때 나타나셨고 그 다음엔 도마가 있을 때 나타나셨다. 그리고 본문은 바로 그 다음 예수님이 세번째 나타나실 때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그 유명한 말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번 질문하셨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께 세번 똑같은 대답을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대답한 것이다. 그레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번 내 양을 먹이라 명령의 말씀하신다. 사명을 주신 것이다.
본문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3이라는 숫자는 무엇을 생각나게 하는가.
바로 베드로의 세번 부인을 생각나게 만든다. 베드로는 가야바의 뜰안에서 사람들에게 세번 주님을 부인했다. 결국 3이라는 숫자는 베드로의 실패와 넘어짐을 상기시키는 숫자였다.
그리고 베드로와 제자들이 해변가에서 제일 먼저 모았던 것은 바로 숯불이었다.
요한복음 21:9에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말씀한다. 제일먼저 눈에 띈 숯불을 보는 순간 베드로의 마음은 어땠을까. 베드로는 그 숯불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베드로가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던 그 장면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리라. 숯불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딱 두번 등장하는데 오늘 본문 한번이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이다. 요한복음 18: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여기서 불을 피우고란 단어는 안트라키안 즉 숯불이라는 정확히 같은 단어이다. 그 숯불가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했다.
그러므로 이 숯불은 그냥 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도적인 셋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야바의 뜰 숯불가에서 세번 부인했던 베드로는 예수님과 숯불가에서 다시 대면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 실패의 현장으로 데려가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이 분명하다.
베드로는 그 실패의 자리가 부끄러워 도망쳐나왔다. 베드로가 가장 수치스럽게 느끼고 잊고 싶은 그 장소로 예수님은 데려가신 것이다. 베드로가 도망치기 보다는 직면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이시다. 도망치면 그 실패의 기억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문제 해결은 도망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아파도 힘들어도 그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려고 그 자리로 인도하신 것이다. 그 실패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그 실패의 자리로 의도적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 실패의 자리에서 도망치고 있다면 그 자리에서 인정하고 다시 주님의 손을 붙잡아야 한다. 주님은 그 실패를 딛고 능히 그곳에서 승리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실패의 현장을 바꾸어 승리의 현장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패의 그 자리에서 승리의 자리로 바꾸는 역설적인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실패한 그 자리에서 우리의 실패의 원인을 깨우쳐주시고 그것을 회복시켜 주신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실패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주님만을 사랑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주님만으로 그 마음과 인생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그 제자들은 인생의 촛점이 주님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 목적이 따로 있었다. 물론 주님을 사랑했고 또 따랐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올라가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들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가지고 다투고 있었다. 결국 예수님을 따르던 목적이 바로 세상적인 성공에 있었던 것이다. 주님만이 나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런데 일이 정반대로 전개되니까 모두가 놀라서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다 도망친 것이고 베드로는 세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자신들을 더 사랑했던 것이다.
결국 실패의 가장 원인이었던 주님 사랑에 대해서 베드로에게 묻고 계신 것이다. 세번의 질문중 첫 두번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고 베드로는 힘없이 '아닙니다 주님! 친구의 우정같은 필리아의 사랑밖에 하지 못함을 아시잖습니까' 대답한다. 아가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요 필리아는 친구간의 우정을 말한다.
그러자 예수님의 세번째 질문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필리아의 사랑으로라도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고 베드로는 필리아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아시잖습니까 대답한다.
이전에는 주님을 제일 사랑한다고 큰소리쳤던 베드로이다. 다 주님을 버려도 자신은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외쳤던 베드로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주님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베드로는 주님께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고백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친구의 사랑 필리아의 사랑으로 고백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비난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베드로의 수준으로 양보하시고 내려오셔서 그 작은 사랑이라도 내게 달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치유의 행위를 보게 된다. 옛날에 나를 제일 사랑한다면서 절대 버리지 않겠다는 베드로, 네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 책망치 않으신다. 오히려 베드로의 실족함을 안타까와하시며 그 어느 누구보다도 최고의 아가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보셨다가 그 다음엔 "더"라는 비교법을 빼시고 네가나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당부하시고 그 다음에는 베드로의 수준으로까지 내려오셔서 친구의 우정 정도로라도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보신다.
결국 이 모든 내용은 "베드로야 나는 네가 나를 부인한 것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것 상관하지 않아 나는 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를 격려하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 것이다.
베드로는 이 세번의 질문을 통해 마침내 치유되고 회복되기 시작한다.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실패와 좌절의 자리에까지 친히 찾아오셔서 그 사랑의 실패를 깨우쳐주시고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주님, 그 주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통해 베드로는 그 넘어짐의 자리에서 마침내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예수님이 자기를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예수님의 반복되는 사랑의 질문을 통해서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가슴깊히 깨닫게 된 것이다. 반복되는 예수님의 사랑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베드로는 치유되기 시작한다. 세번 부인했던 그 상처가 하나하나 치유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쓰러졌던 그 자리에서 그는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자기자신에게만 촛점을 맞추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사는 인생이 된 것이다. "주님만이 나의 전부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필리아의 사랑이 아닌 아가페의 사랑으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한다.
우리는 자주 인생의 크고 작은 실패를 경험한다.
그런데 실패의 원인을 들여다보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공통적인 원인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내 인생의 촛점이 주님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있었던 실패의 원인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은 3년동안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진정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주님을 사랑한다고는 했지만 인생의 촛점이 자기자신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자기 사랑이 더 앞섰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심령이 오직 주님만을 위한 사랑과 주님의 다함없는 사랑이 우리 심령속에 충만하게 채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도 베드로처럼 삶의 여러가지 상황속에서 주님을 또 부인하고 넘어질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심령이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다면 베드로처럼 다시 일어나 우리의 전 생애를 주님을 위하여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신다.
'내 양을 치라' 새로운 사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실패에서 온전히 벗어나게 역사하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이것은 실패하고 넘어진 우리들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결정적인 방법이다. 주님을 부인하고 실패의 자리로 돌아간 베드로에게 숯불앞에서 그에 대한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실패의 자리에서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시고 그리고 새로운 사명을 그에게 주신다. 그러함으로 실패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처음 베드로를 만났을 때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사명을 주셨다.(마태복음 4:19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리고 두번째 사명으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목양의 사명을 주신 것이다. 베드로에게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사명을 새로운 기회로 주신 것은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 더 나아가 온전히 자신을 주님께 드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레그 로리는 저서"The God of the second chance"에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항상 두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설명한다. 이 책에서 돌아온 탕자를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사랑과 감격으로 받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풀어 설명하면서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말한다.
이는 요나 선지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성의 심판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았을 때 그 명령에 불순종하여 베를 타고 도망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폭풍을 보내셔서 요나의 불순종을 깨우쳐 주시고 그가 회개했을 때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다. (요나서 3:1~2 여호오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그리하여 실패의 좌절에서일어나 회복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주신 목양의 사명은 진실로 은혜로운 명령이었다. 내 양을 먹이고 치라는 명령은 넘어진 베드로를 일으켜 세우고 그를 온전히 회복시키는 은총의 방편이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평신도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라 내가 용서했고 내 사랑을 가지고 가서 잘 살아라 그러나 나는 다시는 너를 지도자의 자리에 쓸 수는 없구나 말씀하셨다면 베드로는 십자가에서 거꾸로 순교한 위대한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용서받은 자로서 그냥 그렇게 살다 갔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위대한 목양의 사명을 주심으로 베드로가 실패를 극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죽기까지 충성해서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 요한복음 21:18 '네가....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십자가에서 팔을 벌리고 거꾸로 매달려 영광스런 순교의 자리에 들어갔다.
유대교의 역사가 요세비우스가 주후 64년 네로황제의 대박해 때 베드로는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클레멘트, 토투리안 같은 교구들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기록을 남기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붙잡고 일어나 주님만을 사랑함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완전한 실패의 인생에서 일어나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사명으로 나아간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다니엘 휘트는 미국 메사츠츄츠의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은행에 취직하여 평안하고 안정적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북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북군으로 지원한다. 전투에 투입되어 소령으로 진급했지만 슈류탄 파편에 맞아 오른팔을 잃어버리고 포포로 잡힌다. 포로수용소로 가지는 않고 야전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괴로울 때마다 어머니가 입대할 때 넣어주신 성경책을 읽는다. 어느 날 간호사가 죽어가는 소년병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 소년 병사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에게 부탁을 한 것은 매일 성경을 읽는 것을 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휘트는 거절한다. 그는 팔을 잃어 실패한 인생이었고 포로로 잡혀 실패한 지휘관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성경을 읽을 뿐이라고 매몰차게 간호사의 부탁을 거절한다. 얼마 지난 후 휘트는 소년병사를 찾아보고 얼마 살지못할 것처럼 보였다. 마냥 무시할 수 없어서 마침내 침실에 무릎을 꿇고 한쪽 팔로 그 소년병사의 손과 몸에 대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기도를 마치고 그 소년병사의 얼굴에서 고통이 아니라 평안을 발견한다. 고통의 얼굴에서 평안한 얼굴로 숨을 거둔다. 그 평안한 얼굴이 휘트의 마음을 녹인다. 자신은 실패했지만 실패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사용하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든다. 그리하여 완성치 못했던 시를 완성한다. 그 시가 바로 즐겨부르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이다.
처절한 실패의 자리에 있던 휘트에게 소년병사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사명의 기회를 주셨고 그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구 후로 유명한 부흥사 무디와 함께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고 무디 전도단의 찬양 총감독으로 '주의 진리위해, 십자가의 군기, 빈들에 마른 풀같이, 아 하나님의 은혜로..'등의 수많은 찬양을 작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2천년전에 갈릴리 호숫가에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님이 이 시간 인생의 크고작은 실패들을 가진 우리에게 묻고 계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질문에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
'네 주님 부족하지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만이 제 삶의 전부임을 믿습니다'
이런 진실된 고백이 있다면 주님은 들으시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 사명은 우리의 실패를 만회하고 다시 일어서라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탄식하고 넘어져있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일으켜 주시기를 축원한다. 주님을 향한 첫사랑이 회복되어 땅끝까지 복음 전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충성을 다하여 섬김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성도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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