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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주승중목사님

200503 어린이를 용납하라

어린이를 용납하라


200503                                               주승중목사


(마태복음 19:13~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것이니라 하시고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오늘은 어린이주일이다.

어린이와 관련하여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일화가 있다. 1932년 4월 19일 안창호 선생은 중국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된다. 이 날은 안창호 선생의 친지 자녀의 생일이었는데 며칠 전 그 아이와 약속을 하기를 내가 네 생일에 좋은 선물을 갖다주마 했다. 당시 안창호 선생은 일경에 수배중이어서 바깥 출입이 위험한 때였다. 그럼에도 아이와의 약속을 져버릴 수 없다 하여 선물을 가지고 그 아이집을 방문하다가 체포되었다. 이에 안창호선생은 아이와 약속을 지키려다 체포된 것이니 조금도 유감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약속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창호 선생의 어린아이에 대한 태도를 본다. 자신이 체포되는 경우가 생긴다 할지라도 어린아이와의 약속을 소중하게 여겼고 어린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소중히 대한 것이다.


어린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요 존중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부모에게 종속된 존재요 때로는 무시해도 되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것은 여자들과 아이들을 무시하는 가부장적인 유교문화와 함께 오늘의 우리에게도 알게모르게 스며들어 있다. 이런 아이들을 무시하는 사회 인습적인 문화와 그 태도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도 심하게 있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은 유대 사회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경시했고 숫자를 셀 때에는 카운터하지도 않았다.


본문에서도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올 때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고 말씀한다.

제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그 사람들을 꾸짖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제자들의 그러한 행동은 어린이를 경시하는 그러한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문제가 있었는데 그 이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교훈하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제일 큰 자입니까 예수님께 물었을 때 한 어린아이를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워놓고 마태복음 18:3에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연이어 18:4에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18:5에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더 나아가 18:6에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라는 엄한 말씀도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천국은 마치 어린아이의 왕국으로 여겨질 정도로 어린아이들을 귀중히 여기셨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여전히 어린아이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막고 나서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태도를 보고 노하셨다고 말씀한다. 노하셨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는 크게 탄식했다는 뜻이다. 이미 어린아이에 대한 교훈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적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이 탄식하신 것이다. 그래서 다시한번 예수님께서 교훈의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19:14에서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의 머리위에 손을 얹으시고 기도해 주셨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어린이아들을 용납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어린아이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로 오게 하라는 신앙에게로의 부름, 초대의 말씀이다. 본문에서는 자기 자녀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와서 예수님께로부터 안수받고 기도받기를 원하는 부모들이 있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는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아이들을 데려왔다고 기록한다. 그 당시 예수님께 나온 자들은 각종 병에 걸린 자들과 진리와 교훈을 배우려 나온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 해결을 받기 위해나왔는데 반해서 이들은 자녀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게 하려고 나왔던 것이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존경받는 랍비들 즉 성경 교사들에게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축복 기도를 받는 풍습이 있었다. 이 부모들도 당시 랍비로 알려진 예수님께 기도를 받으며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기를 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상황으로는 이 부모들의 행동에는 위험과 우려가 있었다. 당시의 예수님은 정통 랍비 출신도 아니었고 시골 출신의 선지자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지도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기 시작했고 배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자녀들을 데려와 예수님께 안수기도받기를 원했던 것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고 함께 배척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눈치보이고 곤란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제자들의 꾸짖음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데려와 안수기도받기를 요청한 것이다. 이러한 부모들으의 모습이 참 귀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안수기도를 받게 하는 것은 내 아이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가진 아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운데 살아가는 아이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함게 교제하고 예수님의 복과 은혜 가운데 살 수 있도록 예수님께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누구에게로 인도하고 있는가. 누구로부터 만져주기를 기대하고 있는가. 오늘 우리 믿는이들도 예수님 만나기를 최우선에 두기보다는 좋은 학교 좋은 선생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등을 만나게 하는 것에 최우선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새벽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주님께 데려가서 주님께 맡기려 하기보다는 스카이캐슬에 베테랑 입시 코디네이터인 선생님께 데려가고 학원과 유명학원 강사에게 맡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 믿음의 부모들조타 아이들을 영적인 파산으로 내몰고 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재물도 많이 모으고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게 된다 할지라도 만일 그 아이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허무하고 비통한 일은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 아이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모르고 살다가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진다면 이 세상에서 잠시잠깐 아무리 성공한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고 늘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와야 한다.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유산은 없다.

이제 곧 교육부에서 아이들을 순차적으로 개학을 시킨다. 그 때를 맞추어서 주일학교에서도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최대한 주의하면서 예배를 시작할 것이다. 그 때를 맞추어 우리들도 우리 아이를 주일학교로 데려나와야 할 것이다. 재산을 물려주고 학벌을 물려주고 명예와 지위를 물려준다 한들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도록 돕지 못한다면 우리가 물려준 것들은 다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지금도 내 다섯 형제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 모습이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하시는 일마다 실패하여 경제적으로 늘 어려움 가운데 있었다. 어머니는 그어려운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한나처럼 늘 무릎꿇고 눈물로 기도하던 권사님이었다. 고달픈 생활고가 더욱더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믿음으로 몰고 가게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세명의 누님들이 모두가 다 목사 사모들이다. 누님들 세분이 모두 어머니의 기도에 엄청난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세째 누님이 나에게 한 고백은 '비오고 천둥치며 바람부는 날 밤에 아버지는 무슨 일인지 집에 안계셨다. 천둥소리에 무척이나 무서웠던 나는 어머니의 열정적인 기도소리에 안심하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때로는 울부짖기도 하는 엄마의 기도 소리가 자장가처럼 나의 영혼을 평안하게 했고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어린 나의 마음속에 간직하게 만들었다. 엄마의 기도소리가 나는 그 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우리 다섯 남매의 신앙생활에는 엄마의 잔잔한 기도 소리가 지금도 흐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간절한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간절히 나아가는데 은혜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어" 주미혜 사모의 고백이다. 실로 그 분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때로는 기쁨과 벅찬 감사의 찬양으로, 때로는 목마른 사슴이 목이 갈해서 시냇물을 찾듯이 주님을 찾는 기도의 어머니였다. 새벽이든 저녁이든 낮이든 들려오던 어머니의 음성은 다섯 남매들이 하나님게 나아가게 했던 은혜의 징검다리였다.


부모님의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은 반드시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 은혜의 징검다리가 된다.

우리 자녀들이 어떤 시련과 역경 가운데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결코 넘어지지 아니하고 마침내 믿음안에서 승리하게 만들어 준다. 주님앞으로 우리 자녀들을 인도하는 부모들, 그래서우리 자녀들이 예수님과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은혜의 징검다리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 자녀들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하자. 목사 전도사 선교사에게만 축복기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에게 축복권이 있다. 아침저녁으로 자녀의 머리위에 축복기도하면서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이 이어지게 하자. 아브라함이 이삭이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했듯이 우리 자녀들을 축복하자.

그리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반드시 인도해 주시고 그 인생들을 책임져 주실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용납하라는 말씀은 아이들에게서 배우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신 것은 무슨 뜻인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니까 아이들을 세워놓고 교훈하신 것이다. 이는 실물 교육이다. 어린아이들에게 배우라는것이다. 우리는 늘 아이들이 어른들에게서 일방적으로 배워야 하는 존재로 인격적으로 미완성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어린아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어린아이들을 용납함으로서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배울 점은 무엇인가.

첫째는 단순성(Simplicity)이다. 세상의 욕심과 이기심에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다.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단순하고 순수하다. 복잡하거나 계산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마음의 생각이 복잡해지고 이기심과 욕심으로 때가 묻는다. 계산하기 시작하며 단순함과 순수함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이들에게 배워야 할 것은 단순성과 순수함이다. 이것은 유치함과는 다른 얘기이다. 아직 미성숙하기에 유치함이 있는건 사실이다.

그것은 영어로는 childish(유치함)라 말한다. 이는 단순함과 순수함과는 다르다. 마태복음 18:3에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것은 childish(유치함)이 아니라 child-like(어린아이와 같음) 즉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뜻한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깨끗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을 바로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을 배울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 말씀한다.


교회 김 목사님이 아이를 통해 경험한 얘기이다.

김 목사 집에 아들이 둘 있는데 7살, 5살이다. 신앙교육을 위해 아이들에게 질문한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누구지? 두 아들이 하나님이라 대답한다. 교회 교육국에서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있구나 생각한다. 이에 맞다 그러니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건 뭘까. 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질문한 것이다. 그런데 큰 아이에게서 대답을 듣는다. "아빠, 믿는건 그냥 믿는거예요." 이에 목사님은 맞아, 믿는건 그냥 믿는거지 복잡한게 아니지 생각한다. 이 때 둘째 아들이 결정타를 날린다. "아빠, 아빠는 목사님이라면서 믿음이 없어? 왜 그걸 몰라?" 이에 신앙교육을 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신앙교육을 받았다는 얘기이다. 내게는 잃어버린 것이 아이들에게는 있구나 생각한다. 이는 단순한 신앙 단순한 믿음이다. 신앙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신앙은 신학이 아니다. 신앙은 믿는 것이다.


둘째, 아이들에게 배울 점은 신뢰성(Trustfulness)이다.

아이들은 전적으로 부모들을 신뢰하고 의지한다. 엄마의 품안에서 잠자는 아기는 엄마의 품안이 가장 안전한 곳이고 그곳이 천국이다. 어린아이가 부모님 곁에 있으면 어떠한 위험도 문제가 되지 않고 안심한다. 엄마만 옆에 있으면 만사가 오케이이다. 이렇게 순진한 아이들은 자신이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 간에 부모를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스펄전 목사는 "우리가 아이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신뢰성(Trustfulness)이라" 말한다.


어린아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지하듯이 오늘 우리들도 그러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르고 있는가.

우리는 주님만 바라고 있는가. 믿고 신뢰하고 바라보는 가운데 그 분이 주시는 평강이 내 심령속에 있는가.


지금 나는 미국에 있는 손녀와 페이스북을 통해 코로나 사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큰 위로를 얻는다. 집사람에게서 손녀 얘기는 절대로 하지 말라는 말을 듣지만 오늘 다시 얘기를 한다. 얼마 전에 아들이 손녀 사진과 함께 동영상을 보내왔다. 그 사진들 중에 두장을 함께 본다.

지금 저 아이가 뭘 보고 있는가.

엄마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아빠가 그 모습을 찍었다. 저 아이에게서 천국을 본다. 천국의 모습을 본다. 그 어떤 근심도 걱정도 두려움도 없다. 엄마가 그 앞에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 지금 저 아이는 천국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영상이 있는데 계속 엄마만을 주시한다. 엄마가 거실로 움직이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엄마가 부엌을 가면 계속해서 눈길이 따라간다. 한순간도 엄마에게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돌이 안된 저 아이가 엄마만을 계속해서 쳐다보는 저 모습을 통해서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과연 저 손녀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는가. 목사인 나는 과연 주만 바라보고 있는가. 주님만이 나의 전붑니다 고백하고 있는가. 전적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저 손녀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가.


"주님만이 나의 전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서 배우는 고백이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천국이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천국을 경험할 수 없다. 아이들을 영적 스승 삼아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자.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보게 될 것이다. 이번 코로나 뿐 아니라 그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친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평강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유산을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상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물려주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우선되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