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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조원형목사님

210314 물 위를 걷게 하소서

물 위를 걷게 하소서

 

210314                             조원형목사님

 

(마태복음 14:22~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 두시며 한가지 계약을 맺으신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라. 따먹는 날엔 네가 죽으리라."

그러나 결국 뱀의 유혹을 받은 하와가 넘어지고 하와가 남편을 넘어지게 해서 선악과를 따먹게 된다.

 

그러고난 후 두 사람에게 나타난 이상 현상이 부끄러움이다.

도무지 부끄러워서 그냥은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뭇잎을 따서 치마를 만들어 자기 하체를 두르고 전에는 못느꼈는데 밝은데 나서기가 주춤하고 죄인이 자기자신을 아는지라 그늘 밑으로 숨어 다니지 않았나, 그런 생활이 지속되니까 불쌍하다.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가지고 찾아오신다.

그리고 아담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들이 입었던 나무잎옷을 벗어버리게 하시고 하나님이 가져다주신 가죽옷을 입히게 하셨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만을 가지고 깊히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숨겨진 내용이 무엇일까를 깊히 묵상해야 한다. 이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잘못 성경을 생각하다간 이탈하게 되고 이단이 되어버리고 하나님 뜻을 곡해하게 된다. 조심스럽게 내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서서 자기네가 만들어 입은 나뭇잎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가져다주신 가죽옷을 입을 때의 현상을 좀더 깊히 상상해 본다.

 

아마도 나무잎옷을 입고 그늘로 어두운 곳으로 숨어다니니까 아담과 하와의 몸이 깨끗할 리 없다. 지저분하겠다. 아마도 어린아이가 밖에 나가 놀다가  옷도 더럽고 몸도 더럽히고 집에 오면 어머니나 아버지가 그 아이의 옷을 벗기고 깨끗이 씻기고 다시 새 옷으로 갈아입히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물가로 데려가지 않으셨을까.

 

세례 요한이 하나님 말씀을 외치니까 그 백성들이 세례 요한에게 다가온 것처럼, 그러다 세례 요한이 물로 데려가서 세례를 집례한 것처럼 성경은 자상한 내용을 기록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가로 데려가셔서 우리가 예측해 보건데 깨끗이 물로 씻게 하시고 하나님이 지어주신 옷을 입게 하지 않으셨을까 이런 상상을 해본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옷은 무엇이고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 입었던 옷은 어떤 옷일까.

우리가 신약 시대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종합해보면 사람이 만들어 입는 옷은 내적인, 사람의 마음에 숨겨진 욕망 갈등 시기 질투 혼동 변명 거짓말, 사람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입는 옷, 사람앞에서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긴 해도 그리 몹쓸 죄인이 아니라 해서 사용하는 변명의 말이 아닐까. 지금도 자기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드러날까봐 겁을 내며 거짓말하고 변명하고 책임회피하고 분노한다. 이런 옷이 아닐까.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입는 옷, 그런 옷이 아닐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져다주신 옷은 어떤 옷일까.

어린 양의 가죽을 벗겨서, 양을 잡아서 입히셨을거다 학자들은 말하지만 하나님이 입히신 옷은 무얼까. 하나님 말씀이다. 우리는 말씀의 양식을 먹고도 살지만 말씀의 옷을 입고도 산다.

고린도전서13장에서 사랑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자랑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오래 참고 그런 내용을 쭈욱 설명한다.

그러고보니 우리는 그 말씀을 먹고 그 말씀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데 새옷을 입고 산다고 해서 옷이 늘 새것이 아니다.

얼마 입다보면 외부에서 오는 먼지와 더러운 것이 뭍기도 하고 내 몸의 때가 옷에 뭍기도 하여 세탁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는 살지만 늘 온유하고 겸손하고 순종하고 충성하고 성결하고 거룩하고 인내하고 오래 참고 그런 옷만 입는게 아니다. 우리 속에서 때로는 분노 갈등 시기 질투 이런 것들이 거룩한 신앙의 옷을 더럽힌다.

그래서 빨래하듯 하나님 앞에서 늘 회개하고 마음을 조아려 통회하고 산다. 내 잘못을 고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말씀의 옷을 입으려 노력하고 사는 것이 우리 신앙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큰 무리의 사람들에게 기적을 행하셔서 기적의 떡을 먹이시니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우리 왕으로 모셔야 한다, 경제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냐 하여 왕으로 모시려니까 예수님이 서둘러 모인 사람들을 흩어 보내신다. 제자들을 거기에 두었다간 충동당할까 하여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도록 지시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다. 왜 그러셨을까.

 

어쨋든 제자들이 그 뜻은 모르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는데 해가 어두워진다.

잔잔한 호수에 노저어가도 그것도 두려움인데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배가 뒤집힐거 같다.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아시고 물위로 급히 걸어오신다. 제자들이 바람과 바다와 싸우다가 보니 유령인가 했는데 예수님이시다. 그들이 깨닫고 그 중에서 베드로가 주여 주님께서 물위로 걸어오십니까 절보고도 오라시면 제가 물위로 가겠습니다 했더니 예수님께서 와라 하시기에 그 말씀을 믿고 물위를 걸어가다가 물결과 풍랑을 보고 가슴이 철렁하여 물에 빠진다. 허우적거리며 내가 죽게 되었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 손을 잡아 배안으로 이끄셔서 베드로가 살아나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셨다. 물위로 걸어오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이 분이 누구냐.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알고 따라다녔지만 너무 신기하여 놀란다.

성경 본문의 얘기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신앙인들의 삶이란 것은 성경에는 여행하는 사람이 먼길 나그네길을 걸어가는 비유의 말씀도 많지만 천로역정, 기독성도가 장망성을 떠나서 구원의 톰으로 가는 과정의 이야기이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목회하신 3년반동안의 그 지역인 갈릴리 바다를 빼놓을 수가 없다. 대부분 그곳을 건너가시고 건너오시고 그 근방에서 전도하신다.

그걸 보면서 우리 인생의 삶이란게 무어냐. 신앙의 삶이라는게 바다를 여행하는 것과 같다.

 

문명이 발달하여 하늘길이든 뱃길이든 좋은 기계를 만들어 신속하게 가기도 하고 편하게 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위험한데가 바다이다. 비행기를 타도 비행기가 요동할 때 불안해하고 멀미하고 배를 타도 배멀미가 보통문제가 아니다. 배타는 사람들은 각오하고 사도 바울이 죄수로서 배를 타고 로마로 이송되어갈 때 내용들을 보면 사람들이 배를 타면서 풍랑을 만나지 않게 해 주십사 대풍을 만나지 않게 해 주십사 하는게 소원이다. 그런데 안만날 수가 없다.

 

우리도 배를 타고 큰 바다로 나가면 대풍을 안만나도 편안하게 가는 적이 없다. 물결이 심하고 배멀미를 한다. 배를 타고 처음엔  신바람이 나지만 조금 지나며 배멀미가 시작되는데 제일 안전한 곳이 제일 끝 배밑창이다. 앞머리는 파도를 치고 나아가기에 많이 흔들린다. 바람과 풍랑만 심한게 아니라 마음조차 불안하다. 마음에도 풍랑과 바람이 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회적 풍랑, 사회적 혼란, 세상이 들끓고 전쟁 등을 무시할 수 없다. 육신의 몸으로서 그 영향을 받는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건 내 마음의 풍랑이다. 내 마음이 요동한다. 목사니까 일반 성도들보다도 낫지 않느냐 하지만 기분나쁜 소리 하나 들으면 마음에 풍랑이 일어난다. 인간인고로 어떤 사건이 하나 일어나면 마음에 풍랑이 일어난다. 불안하다. 이걸 이기기 위해서 파도가 심한 배를 타고 가면서 찬송을 부른 것처럼 찬송도 부르고 말씀도 보고 말씀도 생각하고 기도도 하고 그러면서 내 마음의 풍랑을 가라앉힌다.

어느 땐 분노가 솟구쳐 올라올 때도 있고 어느 땐 시기 질투같은게 목사 마음속에도 있다. 그걸 가라앉히고 채찍질하고 내가 나를 쳐서 복종케 하고 그래도 내 마음대로 안되니까 금식하고  내 마음의 풍랑을 가라앉히며 극복한다.

 

우리는 내 마음에 아담과 하와가 자기 옷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지어주신 옷을 입는거처럼 내 자신 속에 있는 욕망 갈등 시기 질투 자랑 교만  이런 것들을 쳐서 복종케 하고 신앙인으로 살며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사랑의 옷, 거룩함, 신실함, 낮아짐, 오래 참음, 인내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를 쳐서 복종케 한다.

배를 타고 항해하면 어떤 때는 배 사고가 나서  물에 빠져 익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겨우 배가 목적지에 도달해서 목숨만은 건진 것처럼 우리 성도들의 삶이 그런게 아닌가 생각한다.

 

내 속에 풍랑이 일어나고 세상 풍랑이 일어났을 때 몸부림치면서 나를 쳐서 복종케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도 모든 문제가 있을 때마다 신앙없는 사람들이라 탓하진 않았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마음에 풍랑이 일어나고 요동이 오고 불안하고 왜 안그랬겠는가. 그런데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보고 그러면서 자기 속의 풍랑을 잔잔하게 하고 마음을 쳐서 복종케 하고 그래서 늘 그가 고백한 내용을 보면 나는 매일 죽노라, 나를 쳐서 복종케 한다, 나는 죄인중의 죄인 괴수다, 자기 자신속에 숨겨졌던 인간성이 자기를 괴롭혔으면 그런 고백을 했겠는가.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풍랑을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극복하면서 오늘을 산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기독교인에게는 세가지 무기가 있다. 말씀의 무기가 있고 기도의 무기가 있고 찬송의 무기가 있다. 그로 인해서 세상을 이기기 전에 내 속에 일어나는 풍랑을 먼저 이겨야 한다. 그리고 겨우 신앙 명맥을 유지하면서 오늘을 산다. 우리 생이 끝나는 날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항구,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는 그런 싸움을 싸우면서 산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가르쳐준 교훈도 네 마음의 풍랑을 다스려라는 그런 뜻이었고 오늘 성경 본문의 제자들에게 실전을 통해서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교훈,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바로 이런 내용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인생은 살아가는 동안에 바람과 풍랑에 요동되는 때와 같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오십사 한다.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건져주신 것처럼 예수님이 건져주시면 사는거고 내 욕망의 인간성에 시기 질투 분노의 풍랑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 회개하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릴 건져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거다. 그게 바로 우리 성도들이다.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오게 하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그래 걸어오라 하셨는데 걸어오라 하셔놓고는 내가 왜 물속에 빠지는가. 모르는 사람들은 원망하고 반항한다. 빠진 이유가 예수님이 오라 하셔서 빠진게 아니라 바람과 바다를 보면서 불안하여 마음속에서 요동이 생겨서 의심이 생겨서 빠진 것이다. 오늘 우리도 그러하다.

 

하나님 말씀대로 물위로 걸으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라 그러면 시험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긴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믿고 살지만 자주 시험들고 물에 빠지는 것처럼 자주 낙담도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이다.  그러나 그 때마다 주여 내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나이다 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아시니까 우리를 건져주신다.

그리고 우리를 배에 태우시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해 주신다. 우리 속의 요동치던 풍랑같은 마음도 잠잠케 해 주신다.

 

에디슨이 유명하여 탄생때가 되면 기념 행사를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해에 그가 쓰던 책상을 열어보니 메모지 한장이 옆 구석에 끼어있다. 자녀들이 그랬는지 기념회원들이 더 흔적을 찾아보려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글을 읽어보니 "살면서 캄캄한 밤이 오거든 요나를 생각해라" 에디슨 본인의 신앙 철학이다. 과학자로서 연구하다보면 자기 생각과 마음에 광풍같은 갈등이 일어났을 것이다. 왜 이러나, 가능하기나 한건가 태풍도 일고 광풍도 일어난다. 계획하는 일로 밤에 잠을 못잔다. 어느 때는 일천번을 실험해서 그 목적을 달성할 때도 있었다. 몇십번 몇백번 실험하다 실패하는데 갈등이 없었겠는가. 낙담이 안되겠는가. 그 때마다 에디슨은 요나를 생각했다. "죽자, 나를 던져라, 죽는 마음을 갖자, 그러면 하나님이 살려주시리라." 에디슨의 신앙이 참 좋았다고 한다. 그러한 고비고비를 겪었기에 위대한 에디슨이 된 것이다.

 

우리도 어떤 때에는 죽자, 나를 쳐서 복종케 하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산다. 대인 관계에서도 그렇고 내 인생 삶에 있어서도 그렇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죽자. 예수님이 그 수모를 겪으시면서도 '이놈들'하고 한마디 하셨을만 한데 죽으신 마음을 가지셨기에 그 수모를 겪으면서도 침묵하신다. 그 고통에 몸부림치지만 극복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기에 부활의 아침에 일어나신 것처럼 우리도 신앙 생활하면서 몸부림치며 갈등할 때가 많고 대풍이 일어날 때가 많지만 하나님 말씀이 있기에 나를 친다.

세상과의 싸움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이다. 이웃과의 다툼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이다. 이권 다툼이 아니라 죽는 것이다. 그런 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게 된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에디슨이 요나서를 통해 얻는 교훈처럼 시험에 들고 풍랑이 일어나거든 베드로와 예수님을 생각하라.

우리는 물 위를 걷는 사람들이다.

늘 시험들기 쉽고 늘 낙심하기 쉽고 절망하고 불평하기 쉽고 캄캄한 밤이 온 것처럼 불신에 빠져들기 쉬운 그런 인생이지만 물위를 걷는 사람들이지만 이 말씀으로 신앙의 능력의 횃불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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