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되심을 알지어다
210307 조원형목사님
(시편 46: 4~11)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이 죄인의 몸이 되어 로마로 압송을 당한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가야하는데 그 경로가 순탄치 않았음을 성경은 상세하게 기록한다. 사도 바울을 태운 배가 바다를 항해하는데 풍랑을 만난다. 그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유라굴라 강풍을 만나며 배를 탄 선장 선원들 승객 모두가 다 혼란이 와서 죽기살기로 바람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바다와의 싸움, 자연과의 싸움, 환경과의 싸움을 배를 타고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세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자연과 싸우고 환경과 싸우고 또 세상과 싸우다보면 각박해진다.
그런 싸움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보면 이웃과도, 함께 있는 사람과도 분쟁이 계속된다. 신경이 날카롭고 매사가 부정적이고 반항적이다보니까 가족과도 싸우고 이웃과도 싸우고 다투면서 자신의 뱃길 여행을 하게 된다.
이럴 때에 사도 바울은 어땠을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사는 부름받은 사명자이면서도 남을 위로하고 하나님이 배탄 사람들을 향하신 뜻이 무엇이고 주신 말씀이 무엇인가를 전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을 곡해해서는 안된다. 믿음이 충만하니까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고 죽을 지경이 되어도 믿음을 가졌으니까 요동하지 않았으리라...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보면 사명자들도 인간이다.
어느 때에는 죽어도 좋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가서는 내 생각, 내 마음 속에 풍랑이 이는 것처럼 불안하게 된다. 갈등하고 고민하게 된다. 오늘 이러한 내용을 깊히 생각해 보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마치 배를 타고가다가 풍랑을 만나 환경과 싸우는 뱃사람들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잔잔한 호수를 노저어가는 것처럼 순탄치가 않다. 때론 태풍을 만나고 광풍을 만나고 그러다보면 자연과 싸우고 환경과 싸우고 일터와 싸우고 그러다보면 내가 나를 못이겨서 가족과도 싸우고 형제와도 싸우고 그러면서 우리 인생을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 말씀을 믿고 기도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평안할 때도 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름받았으니까 내 인생 내 삶을 하나님 앞에 다 맡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 수도 있다. 그런 수단도 있고 그런 위로도 받는다. 그러나 때로는 불안에 떤다. 초조해진다. 갈등 속에 고민도 한다. 이런 순간의 시간이 사도 바울에게는 없었을까.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럴 때 사도 바울은 어떻게 했을까.
사도행전 27장 앞뒤에 있는 장면들을 읽어보고 문맥을 살펴보면 어떻게 그 위기속에서 견뎌내었나를 상상할 수 있다. 기도한다. 말씀을 의지한다. 찬송한다.
목포에서 흑산도까지 배를 타고 간 적이 있다.
항구에서 처음 출발할 때는 큰 바다를 나가기 전에는 배를 타고 여행한다, 바닷바람을 맞아가면서 기분좋은 생각에서 출발했는데 이 배가 큰 바다로 나가니까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를 어찌 대처할까 하다가 제일 끝 낮은 자리, 흔들림이 많는 뱃머리보다는 배 맨끝의 끝자리에 앉아서 찬송을 불렀다. 그 때가 제일 많이 찬송을 불렀던거 같다. 흑산도까지 두시간 가량 걸리는데 계속해서 찬송을 불렀다. 그러니까 내 속사람이 정리가 되는 경험을 가끔 생각한다.
문제는 나 자신이다.
요나서에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니느웨성으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을 간다.
처음엔 배가 순탄하게 출항한다. 무사히 다시스 항구까지 도착할 줄 알았다. 그런데 대풍이 불기 시작한다. 배탄 사람들이 요동하고 난리가 났다. 그 당시의 심한 풍랑을 이겨내기 위해서 있는 것도 다 버려본다. 그래야만 그 심한 파도에서 배가 가라앉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건 다 버린다. 그러다가 안되니까 사람들에게 시비가 붙는다. 이게 누구 탓이냐, 누구 죄냐, 제비를 뽑아보자. 결국 싸우다가 요나가 걸려든다.
오늘 사는 우리 인생이 그러하다.
집안이 평안하고 태평하고 만사형통할 때에는 모두가 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부정적일 수 없고 싸울 필요도 없고 편안한 가운데 시간을 보내지만 막상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면 풍랑만난 뱃사람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탓하고 누구 죄 때문이냐 누구 잘못이냐 이런 문제가 왜 났느냐 시비가 붙는다.
그 때 요나에게서 배우는 것이 무엇인가.
나를 던져라. 내 죄 때문이다. 자기자신이 책임지는 마음,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마음이다. 그런 요나를 하나님은 다시 살리셔서 사용하신다.
이기혁목사님이 생각난다.
인천쪽에서는 한경직목사님만큼 신앙이나 삶에 있어서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던 어르신이시다. 1977년도 즈음 봄에 경기도 용문산 중앙기도원에서 만나뵙고 은퇴하신 어르신이 40일 금식기도후에 축복기도를 받고 개척교회의 일들을 하나하나 헤쳐왔다. 책에서 보니까 이 분의 특징이 교회에서 목회하실 때 일이다.
아침에 교회로 출근하시면 부교역자들이 신문을 놓고 이렇고저렇고 논쟁을 벌린다. 목사님이 무슨 일입니까 물으면 세상이 이렇습니다 이 사건은 이렇게 되었습니다 보고드리면 그렇습니까 그 신문 나한테 좀 주십시오 하고는 그 신문을 들고 사무실로 가서 읽으시는게 아니라 교회로 올라가신다. 교회 강단앞에서 신문을 펴놓고 무릎꿇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자기네끼리 싸우고 옳으니 그르니 내편이니 니편이니 싸우는게 아니라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여겨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통하여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 성전에 오르는, 아주 귀한 신앙의 모습을 후대들에게 보여주셨다.
왜 한국 사람들이, 세계 사람들이 옛날에 없었던 마스크를 쓰고 교회에 나올 때에 다 입을 막고 그러나. 이건 분명 하나님의 징계이다.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 말씀 듣고 하나님 앞에 찬송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성도들끼리 모이면 말씀 안에서 형제자매, 한무리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갔으면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모일 때마다 예배시간 빼고는 그렇게 다툴 수가 없다. 전에 농담삼아서 나는 회를 싫어한다 했더니 회가 얼마나 맛있는데 그러신가 한다. 이에 나는 횟집 동네에 살았는데 회를 싫어한다 하니 말을 못알아듣고 어촌에 살았는가 한다. 이에 내가 제일 싫어하는 회가 당회, 제직회, 여전도회 이런 회를 싫어한다 하니 그 때서야 사람들이 웃는다.
회의만 하면 싸운다. 예배가 끝나면 노회에서도 그렇고 총회에서도 그러하다. 모이면 싸운다.
하나님 앞에 민망하다. 사람들이 많으니 의견이 많다. 교인들도 생각이 있고 나름대로의 안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말로 싸우는 장소인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교회와서도 입을 막고 예배드리도록 하신거 같다.
못 모이게 하는게 징계이다. 너무 시끄러우니까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한다.
헨리 나원이라는 영성 신학자가 말한다.
"성도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알고 또 알면, 체험하고 공부하면 유식한 무지로 돌아간다."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잘못 공부했기 때문에 모르니까 떠들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자기 얘기가 많고 아는 척한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깊히 알면 더이상 따질 것도 없는데 마치 무지하고 바보처럼 늘 감사하고 늘 믿고 살게 된다. 시끄러운 것은 하나님을 잘 몰라서 그러하다. 하나님에 대해서 체험이 없기에 그렇다. 하나님 아는 지식이 옹졸해서 그렇다. 하나님 아는 지식이 깊어지면 말이 없어진다. 말이 필요없다. 하나님 믿는 믿음으로 충천하다.
옛 시골에서 교회들끼리 야외 합동예배를 드린다.
예배하며 교제하고 오락프로그램도 갖는 기억이 난다. 또한 이후엔 캠핑 예배를 드리는데 프로그램에 참석한 교인들이 거주하는 곳에 천막을 친다. 그리고 한 곳에는 성막되는 천막교회를 쳐놓는다. 그리고 교회라고 표시한다. 사람들이 자기 있던 곳에서 한명씩 성전을 향하여 온다. 성전 문앞에 문구가 있는데 그걸 읽고 들어가게 한다.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삶을 품으시고 사랑하시고 이끄시고 인도하신다는걸 잊지 말라는 것이다. 성전에 들어가면 쓸데없는 자기 욕망의 소리를 내고 쓸데없이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고 내 삶을 내 인생을 품으시고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가지라는 권고이다.
처음 개척교회를 하면서 교회란 무엇인가, 성도들에게 강해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여러번 경험하면서 지금껏 40여년동안 예배 시작할 때 묵도하며 인용한 내용이 "우리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네 신을 벗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신령한 진리 가운데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른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네 발에서 네 신을 벗을 것이라는 것은 네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응하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라는걸 권고하면서 예배를 시작한다.
우리가 하나님 공경하는 신앙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맡겼다고 하면서도 내 속사람은 그러하지 못하다. 늘 요동하고 늘 풍랑이 일어나고 늘 불안하고 늘 짜증나고 원망하고 내가 나를 다스리지 못해서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이다.
풍랑이 문제가 아니고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내 마음이 문제이다.
내가 믿음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충천하면 범사에 감사하고 찬양할 일이다.
출애굽기 13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다.
10가지 재앙이 일년동안 애굽에 내려지면서 바로가 끝내는 손을 들어버리고 모세가 히브리 백성들을 이끌고 나온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우리가 은혜를 받고 춤을 추는 심정이 되었어도 그 때의 심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이 항복을 선포한 8.15 광복절에 해방된 그 때에 그 소식을 들은 대한민국의 애국자들, 운동가들,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감격 감동이었을 것이다. 가나안 땅을 향해서 하나님이 이끌어내셨다.
그러면 모세는 어떤 사람인가. 똑똑한 사람이다. 바로 왕궁에서 40년동안 교육받은 사람이다.
또한 40년동안 광야에서 그 많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며 이겨내며 사는 훈련된 사람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오는데 하나님이 추궁하신다. 모세에게 네가 알아서 데려가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모세가 나오면서 가나안땅으로 빨리 가기 위해서는 지정학적으로 북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가야 한다.
그걸 생각하고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은 생각치도 않았던 곳으로 이끄신다. 그게 홍해길이다. 모세의 심정이 어땠을까. 상식밖의 일이다. 당황했을 것이다.
신앙인이기에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무릎꿇고 순종하지만 나중에서야 그 길이 다른 길임을 깨닫게 된다.
모세가 갈등을 얼마나 했으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권면하셨겠는가. 백성들에게도 그렇게 권면하라 하신다.
오늘 하나님이 내 하나님 되심을 믿는 믿음이 적어서 흔들리고 요동하고 낙담하고 짜증내고 원망한다.
결국 나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하는게 가장 최우선 행위이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이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고라 자손들이 '중요한건 내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하는거라 흔들리는건 우리들 문제라' 46절에서 고백한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흔들리는가.
바람이 안불어도 내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생각해보면 내 마음이 흔들리고 떤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지시받았을 때에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했다."
갈대아가 무슨 곳인지도 모르고 가라 하시니 갔다. 아브라함도 70년 산 인생이다. 도무지 이해가 안되지만 하나님이 가라 하시니 갔다. 순종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머리로, 내 이성으로, 내감정으로 예수 믿으려 하는게 문제이다.
야곱에 대해서 성경은 자세하게 기록한다.
처음엔 환경과 싸운 사람이다. 형과 싸우고 조건과 싸우고 둘째로 태어나서 장자의 명분이 그렇게 탐이 났다. 그런데 깨닫는다. 어려운 시절을 겪고 이게 아니구나 깨닫는다. 결국 나와의 싸움, 내 자신의 정욕과의 싸움, 내 속사람과의 싸움임을 깨닫는다. 그제서야 하나님은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하신다. 너와의 싸움에서 이긴 자라,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이긴 자라는 이름을 주신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공경할 때 환경의 문제도 많았고 종교의 문제도 있었고 여러 문제가 많았지만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된 것은 나와의 싸움, 쳐서 복종케 하는, 죄인중의 죄인 괴수라 자기와의 싸움에서 자신을 못된 사람중의 못된 사람이라 알게 된다.
구약 성경에서 한나를 생각한다.
한나의 훌륭한 점이 남편과 싸우거나 남편의 작은 부인과 싸우는 것보다는 자기와의 싸움에 하나님의 성전으로 달려간다. 기도한다. 결국 자신을 이긴다. 하나님은 이긴 자에게 축복하신다. 영적으로 이기니까 생활로도 승자가 된다.
오늘, 우리는 오늘을 살며 내 욕망에 휘둘려서 쓸데없는데 요동하며 분쟁하고 다투고 싸우며 인생을 허비한다.
성경 본문에서 주시는 오늘의 말씀은 ...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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