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구하라
조원형목사님
00352
마태복음 6:25-34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흥부와 놀부 이야기가 있다. 우리의 전통 관습으로는 형인 놀부와 동생인 흥부를 부를 때 놀부와 흥부라 하여야 하나 도덕적인 측면으로 보아 선의 상징인 흥부와 악의 상징인 놀부로서 흥부와 놀부라 부르지 않나 생각한다. 이 흥부와 놀부를 10여년 전부터 대학가에서는 놀부와 흥부로 바꾸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재조명한 것이다. 가족도 부양못하는, 모자라며 책임질 줄 모르는 흥부와 나쁘고 욕심많은, 자기만 아는 사람이지만 훌륭한, 가장 잘난 놀부라 평가한다. 이에 현대인 기성세대의 반응은 학생들 말이 맞다. 책임을 다하는 놀부와 모자라는 흥부를 생각하고 흥부네 가게에서 놀부네 가게로 명칭을 변경 사용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중에서 빠뜨린 이야기가 있다. 즉 그 결과는 흥부는 잘 살고 놀부는 하늘이 벌주었다는 내용이다. 매사를 경제적인 것으로만 보는 수준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한다고 하다가 신의를 져버렸다. 법대로 하자면서 자기 유익만 추구하는 법을 고른다. 모든 것을 계산적으로만 처리하는 상태이다. 야박한 사회이다. 내게 유익이면 선이고 내가 손해보면 악이라 한다.
新神學的 이야기가 있다. 좁은 시야에서 현대인의 계산방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1)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이 있다. 나머지 99마리를 버려둔 목자, 99마리가 사고났다면 어떡하는가. 경제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문제가 있다.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며칠동안 찾은 목자의 시간, 마음, 정력, 물질적 손해로 그 양에게 벌을 주어야 정의가 살지 않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와서 잔치를 베푼다. 잔치란 떡과 고기, 채소를 소비한다. 또한 고기를 위해서 짐승도 잡아야 한다.
2)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목자 한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양 천마리가 아깝지 않는데 어떠한 계산으로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가. 사회, 정치, 경제적 계산으로도 이해가 안된다. 자식처럼 키운 애완동물을 위해서 가족의 목숨을 내놓는다면 가능한 이야기인가.
實利的으로 계산을 따지자면 그렇지만 신앙인은 달리 생각해야 한다.
양 한마리가 길을 잃어 죽어간다. 99마리 양도 중요하지만 목자가 그냥 잘 수가 없어 위험을 무릎쓰고 양을 찾아 나선다. 설사 목자가 낭떠러지로 잘못 떨어져 죽어도 후회없다. 왜냐? 사랑때문이다. 도덕적으로 보아도 아이들에게는 새옷을 입히지만 부모에게는 안해 주느냐. 부모는 빨리 죽으므로 자식에게만 옷을 해주어야겠느냐. 효도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잇속만 따지며 살 수 없다. 현대인은 경제적인 동물이다. 즉 마음 쓰는 것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돌아온 아들에게 잔치를 베푼다. 탕자의 형이 볼 때는 화가 날 일이다. 왜 이렇게 환대하십니까. 현대인의 계산 방법이다. 내게 잘하면 선이고 내게 못하면 악이다. 잃었다 얻은 아들이다. 신앙인의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다.
삶의 기준은 무엇인가. 인생은 나무 잎새중의 하나와 같다. 현대인은 쓸데 없는데 많이 신경을 빼앗기며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
마태복음 6장 28절의 생각하여보라는 말씀은 1) 하나님이 먹여주신다는 것은 계산하고 따지다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림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 사람이 새만도 못하느냐. 새는 동료의식이 강하다. 2) 하나님이 입히신다는 것은 허영에 들뜬 사람, 명예, 명분에 집착하므로 들의 꽃, 풀을 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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