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아진 자의 기쁨
11051 조원형목사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복음 3:22~30)
손주 녀석이 "할아버지 설교 준비는 어떻게 하시나요? 좋은 말씀만 뽑아서 하시나요?" 하는 질문에 "그렇다 "하고 돌려보낸다. 하나님께서 주시는대로 생활가운데서 헤아리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모아 설교한다. 생활을 성경가운데서 깊이 찾아 설교한다.
마태복음 13:47~48에서 그물로 고기를 잡으면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도 잡히는데 나쁜 고기는 골라서 버린다. 예배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삶의 그물을 가지고 신앙적, 육체적, 정욕적인 것을 구별하여 말씀을 들어야 한다. 예배자의 자세이다.
말씀을 듣는 시간이 생각을 정리하고 다짐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설교의 뿌리, 주요점은 무엇인가?
생의 경험, 사건을 통하여 말씀, 약속을 통해 돌아본다.
광솔불을 들고 밤길을 가다가 불이 꺼지면 모든 것이 안보인다. 곧바로 가고자 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가만히 감고 기다리면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인다.
밤도 인내하며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게 길을 내어준다.
높은 산이 낮은 호수와 연결된다.
높은 산에서 샘이 흘러넘치게 해도 물을 모을 수가 없는데 호수는 어찌 물을 모을 수 있었나? 자신을 낮추고 깊은 웅덩이보다도 더 낮추니 물이 고인다. 깊은 웅덩이란 못된 인간을 말한다. 못된 인간보다도 더 낮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무엘상 16:5에서 압살롬의 반역에 다윗이 도망한다. 이 때 사울 집안의 못된 인간 시므이가 다윗에게 악담한다. 그 못된 인간을 베어버릴까요? 했더니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이며 놔두라고 말한다.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진동해도 낮아진 자에게 자비를 베푼다.
지구 재앙 이전에 공룡이 있었으나 재앙 이후 살아남은 것은 작은 설치류였다. 자연의 세계에도 큰 자보다도 작은 자가 복되게 산다.
본문에서 놀라운 간증을 하는 요한을 본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예수님앞에서 내 자신을 낮추는 기쁨이 충만하다. 물론 예수님도 죄인들, 못된 인간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셨다. 이러한 신앙인이어야 한다. 끊임없는 기도와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어떤 마을에 현자 한분이 살았다.
외딴 길을 가다가 큰 보석 한개를 줏었다. 그 보석을 가져다가 주인이 나타나면 주리라 생각하고 집에 가져가 둔다. 어느 거지가 밥을 얻어먹으러 와서 방안에서 대접받으며 방안의 보석을 유심히 본다. 그리하여 그 보석을 달라기에 현자는 흔쾌히 내어준다.
그러나, 그 다음날 거지가 다시 찾아온다. 보석이 없을 때에는 잠을 달게 잤으나 이제는 잠이 안온단다. 잠을 설쳤고 그래서 도로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서슴없이 보석을 달라고 할 때 내어주신 그 마음을 얻고 싶다고 말한다.
가진 자. 빼앗은 자, 성공한 자가 편할 것 같아도 그 마음에 두려움, 고민이 있을 수 있다. 양보하고 내어준 자가 편안히 잘 수 있다. 내 욕망을 낮은데 두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자랑도 포용해 주어야 큰 자이다.
사람의 두려움이 있다.
내적으로 약해서, 허물, 감추어진 죄와 기억등으로 두렵다. 마태복음 5:13에서 너희는 소금이라. 소금은 부패 방지와 맛을 내게 한다. 말씀으로 내 마음을 채울 때 감사와 기쁨이 있다. 마태복음 5:14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캄캄한 밤도 두렵다. 빛이 비추면 해소된다. 빛은 우리 마음의 두려움을 없앨 뿐 아니라 해야 할일을 하게 한다.
세상의 모든 핍박이 와도 두렵지가 않다. 하나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면서도 기쁨이 충만하다.
중세의 에피크루스는 인간의 3가지 욕구를 말했다.
먹고 입고 생활하는 의식주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도 생긴다.
성욕도 자연스런 욕구이지만 다스리지 못하면 해가 된다.
부와 명예,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철학자가 말한 3가지 욕망이 세례 요한에게는 없었을까?
시기와 질투를 쳐서 복종케 한 사람이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이다. 당시 유대는 종교국가로서 대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왕의 자리보다도 더 높다. 하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가 가야바였다. 종교적 시기, 질투 때문이다.
얻어먹는 거지 세계에도 시기, 질투는 있고, 높은 자리에서도 있다.
당시의 안나스라는 가야바의 장인인 제사장도 있었다. 그도 함께 예수님을 못박았다.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의 십자가행을 먄류했으나 가야바의 아내이며 안나스의 딸인 여인은 남편의 출세를 위해 중간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교회 일꾼들도 시기, 질투를 뽑아버려야 한다. 가인이 시기, 질투로 동생인 아벨을 죽인 것처럼 시기, 질투는 세상에 해괴한 일을 일으킨다.
세례 요한은 시기, 질투를 참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거꾸로 기쁨을 얻는다.
병 치료의 근본은 웃음이다.
시기와 질투가 고질화하여 고집이 된다.
남의 칭찬을 순수하게 받아들여라. 남을 경계하는 것도 병이 된다.
남을 칭찬하고 동조하라.
또한 자신을 소중히 여겨라. 하나님앞에 쓰여지고 헌신할 수 있어서, 지신의 현재 처지의 그 이상에 촛점을 맞추어라. 요셉은 노예로 끌려가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천민으로 추락하지 않은 이유이다. 우울하거나 염세적이거나 절망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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