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는 사람
121125 조원형목사님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12:1~7)
디엘 무디가 큰 집회를 가졌다. 인산인해로 대성황이다.
한 방송에서 인터뷰를 신청하나 회개하는 이들과 상담하다보니 시간이 없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 부흥회의 목적인데 끝났으니 인터뷰를 요청한다. 끝내 시간이 없어서 거절하지만 다음날 신문에 "교만한 전도자 무디"라는 제목으로 비방한다.
동역자들이 이를 보고 화를 낸다. 그러나 혹평의 대상자 무디는 침묵한다. 이런 기사를 보고도 가만히 있음에 또 분노하고 항의함에 무디는 기자들이 잘 모르고 쓴 글이라고 말한다. 나를 잘 알고 썼다면 나는 사회에서 매장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신문에 난 그 말이 맞다고, 교만하고 못된 사람이라고 겸손히 말한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내가 겸손하다면 나 자신을 아직 모르는 것이고 내가 교만하고 내 마음대로 안된다고 탄식하며 산다면 진정한 겸손한 사람이라 평할 수 있다. 분노하는 것은 나를 알아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교만하고 나를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 더 크다.
나는 정의의 사람이요 불의에 못참는다 해도 스스로가 속는,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다.
겸손한 사람은 어떠한 말을 들어도 당연히 여겨야 한다.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은 교만한 사람이요 못된 사람이요 멸시받음을 당연시 여긴다.
정신분석학자인 칼맨 링거 교수는 태도는 사실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실이 아니고가 아니고 내가 어떤 자세로 응수하느냐가 문제이다. 태도로서 겸손과 교만이 갈린다.
화를 잘 내는 것이 성격탓만은 아니다. 겸손하게 다스리는 훈련이 못되어진 것이다. 화가 나고 사실을 밝히고 싶지만 시간이 지나 연단이요 교만임을 깨닫는다. 세상을 알고 우주의 진리를 모두 아는 것 같지만 내가 내 자신을 모른다. 오히려 주위 사람이 나를 더 잘 안다.
남에게 속는 것은 분노하면서 자신에게 속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 내 자신을 모르고 내 달란트를 모른다. 내 달란트대로 충성하고 봉사해야 할 것을 더 큰 일을 하고 더 대접받아야 할 것으로 교만하고 착각한다.
촉망받는 피아노 연주자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데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근처에서 연주하며 제자를 구한다기에 오디션을 받는다.
나름대로 보통보다 더 나은 연주를 끝마치니 그 답변은 이 실력으로는 세계적인 것은 망상이라는 말에 충격받고 피아니스트를 그만 둔다. 나이들어 그 혹평했던 사람이 다시 왔기에 항의하기 위해 찾아갔다. 이에 대한 대답이 기억하고 있으며 훌륭했다고 말하니 왜 그리 혹평하였는가 물으니 모두에게 그렇게 말한다고 대답한다. 하면서 당신을 망친 것은 내가 아니고 당신의 모진 성격이라 말한다. 고난 역경 좌절 고통을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본문에서 자신을 잘 몰랐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들려 전도자로 살게 된 사도 바울이 자신을 알아간다.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과 자신에게 제동을 거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의 처지를 고백한다.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속에서도 신앙생활하면서 육해공군의 훈련이 다르듯이 훈련의 척도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시험 유혹 시련을 이기기 위한 연단이 필요하다.
야곱이 형 및 외삼촌과의 충돌이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사자와 싸워 환도뼈가 부러지며 얍복강가에서 거듭난다. 그리하여 철천지같은 원수가 하나님의 사자로 보인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나의 못된 성정때문에 하나님이 가시를 주셨다.
'말씀 > 조원형목사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1202 예수를 아는 사람 (0) | 2012.12.06 |
---|---|
121125 장래의 좋은 터 (0) | 2012.12.05 |
121118 감사하는 자가 되라 (0) | 2012.11.20 |
121111 평강을 소유하라 (0) | 2012.11.20 |
121104 선한 증거 (0) | 2012.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