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에 소중한 것
130323 조원형목사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28)
프랑스의 경건주의 운동가 잔느비용의 간증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히 체험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했다.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다 생각하는가. 행복하다 생각하는가.
그는 16살에 22살이 더 많은 지체장애인과 결혼한다. 결혼했다기 보다 팔려가서 극진히 섬기는데도 폭행까지 당한다. 시어머니까지 구박하고 후에는 그 집의 종까지 자신을 무시한다. 그러한 중에서도 성전에 뛰어가 기도하고 위로받는다. 그러한 생활중에도 도망갈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고 견뎌낸다.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포기하지만 삶을 포기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의 평안을 느낀다. 극한 상황에서야 신앙적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는다.
젊은이가 고통중에 '그까짓것 죽으면 그만이지' 말하지만 생의 진정한 고통과 생명의 위대함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한다.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노인들의 생명의 애착을 이해하게 된다.
프랑스는 대통령의 사생활까지도 드러나는 세상이다. 그 나라는 그러한 사실을 탄핵없이 그냥 넘기는 세상에서 경건하게 사는 것은 힘든 세상이다. 한 아이가 창고 문을 열기 위하여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열면서 애를 쓰는 것을 본 어머니가 거기에 맞는 창고키를 내주어 열게 한 것처럼 잔느비용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 키 포인트를 자기 포기라 말한다.
여러 사람의 신앙생활을 지켜보지만 교회 생활을 하던 사람이 차츰 교회와 멀어지면서 오히려 불신앙자보다도 못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된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져나간 가지가 돌포도나무보다도 못한 것을 본다.
딸이 불신자와 결혼하여 신앙을 버리고 멀리 이사를 갔다. 멀리 피한 곳이 하필 부친의 친구되는 목회자 교회가 있는 곳이었다. 부친이 계속 신앙생활을 권유하지만 거부한다. 딸이 몇년후에 7살된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는다. 그리하여 교회로 가서 통곡을 한다. 그 교회 목회자가 지켜 보니 친구 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고 전한다. 결국 나중에는 온전한 신앙인이 되었다.
생명의 소중함도 극한 상황에 이르지 않으면 모른다. 하물며 영적 생명 역시 더욱 중요하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일주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640Km)이지만 40년이나 걸린다.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을 열기 위해서 광야 생활을 하게 하신다. 생각이 막힌 사람은 광야에서 모두 죽고 생각이 열린 사람들만 남아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
성경 본문 말씀이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누구신가, 사람들이 엘리야, 세례 요한, 선지자라 말하지만 너희는 누구라 하느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대답케 하신 것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지만, 그렇게 대답하고도 제자들은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간다.
자부르스키의 간증이다.
구소련에서 원래 포악한 군인이었다. 부하뿐만 아니라 민간인조차 잔인하게 다루었다. 당시는 잔인한 것이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 신앙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서 상관이 이를 보고 오히려 '예수를 포기하고 공산당원으로 가입하라'는 상관의 명령을 듣는다. 상관으로서의 책임추궁을 당하지 않으려고 상관이 권고한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이 '육이 살고 영이 죽기보다는 영으로 살겠다' 하며 그는 감옥으로 들어간다.
후일에야 감옥에서 풀려나 마음껏 신앙생활을 한다.
본문에서 자기 자신에게 부여된 십자가를 감당해야만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다면 구원자가 될 수 없었다. 제자가 제자될 수 있는 것은 자기 몫의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다. 이 십자가의 의미는 돌포도나무의 가지를 잘라서 참포도나무에 접붙이는 과정,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과정,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과정이다.
마태복음 4:18에서 베드로는 어부로서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시작부터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다. 성령께서 시작부터 함께 하신다.
본문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함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덕분이다.
베드로가 베드로 될 수 있고 수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끝까지 순종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다.
창세기 22:10에서 네 독자 이삭을 바쳐라는 말씀이 나온다.
나이 130 다된 늙고 노쇠한 노인에게 순종하는 아들 이삭은 왜 아버지가 자신을 묶는지 알고도 순종한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삭을 죽이려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다린다. 결국은 아들 대신 수풀에 걸린 수양을 제물로 바친다. 모리야 산에서의 사건이다.
오늘날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했다.
성경 본문 말씀이다.
자기 십자가, 자기 본분의 십자가를 져야만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자신을 포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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