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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조원형목사님

160529 계집종의 자녀

계집종의 자녀

 

160529                                                               조원형목사님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라디아서 4:28~31)

 

밀턴의 실락원에서 마귀의 소원은 오직 한가지. 이 세상 사람 모두를 지옥으로 끌고가는 것이다.

특히 예수믿는 자를 지옥으로 가는 것을 더 기뻐한다. 왜 그런가. 실락원에서 말한다. 에덴에서 하와와 아담이 죄를 범하지만 뱀은 내쫒고 사람에게는 불쌍히 여겨 회개케 하고고쳐 돌아오도록 하심에 대한 시기 질투심 때문이다.

마귀의 특징은 시기와 질투이고 분노이다. 신자는 잘못해도 용서를 구하고 고치고 이해와 포용으로 살아가려 한다.그러나 불신자는 시기 질투 분노이다.

 

성령을 통해서 난 사람, 인간의 힘으로는 잉태가 불가능했던 사람이 사라의 아들 이삭이다.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지만 종의 자녀 하갈의 자녀 이스마엘은 시기 질투했다. 에스더 3장에서 아락사람 아만이 총리직만 충실히 감당했으면 됐는데 유대인을 시기질투하여 모르드개를 장대에 매달아 죽이고 모두 죽이려 하지만 결국은 자신과 자기 가족이 거꾸로 몰살당한다. 시기 질투 때문이다. 이삭은 자유하는 자, 성령으로 난 자이지만 이스마엘은 육체적, 혈통적으로 난 자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사라가 있었고 후손이 없자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지만 그들이 시기 질투 분노 때문에 그 집에서 내보내게 하셨다.

 

우리나라가 정부 수림 후 혼란이 거듭될 때 국회에 분노로 인해 인분을 뿌린 사건이 있었다. 미국 외교관이 당시 대통령을 방문한다.

한국 사람은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참습니다. 이 말에 대통령은 고개들지 못한다. 사회가 혼란했던 것은 배고픔이 아니라 시기 질투 분노 때문이라 지적했다.

 

옛날뿐만 아니라 지금도 나보다도 악한 사람이 더 복을 받고 잘되는 것에 분노하는 것이 전승처럼 이어지고 분쟁이 일어난다. 시기 질투 분노 때문이다.

지금 이 사회의 문제도 아무 상관없는 사람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폴로렌스에서 온 참사관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그림을 부탁한다. 당시의 무명 화가 미켈란젤로에게도 그림을 부탁했다. 참사관들이 다빈치에게 찬사를 보낸 후에 미켈란젤로에게도 칭찬을 거듭하자 다빈치의 질투로 방탕하며 술과 분노로 세상을 마감했다는 말도 있다. 칭찬 격려했다면 더 훌륭했을텐데 술과 방탕으로 생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불이 난데 기름붓는 것처럼 시기 질투 분노에 마귀는 더더욱 부채질하고 미혹하게 한다.

예수믿는 사람도 시기 질투 분노가 있지만 다스리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아 살아야 한다. 갈라디아서 19장에서 음행 호색 방탕뿐아니라 시기 질투 분노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씀한다. 야고보서에도 시기 질투 다툼이 있지만 드러내지 말고 다스려 성령으로 난 열매를 맺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동생 아벨을 죽일 수 있었는가. 가인도 시기 질투 분노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벌하지 않았다면 아버지 어머니도 죽였을지 모를 일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죄라면 우리와 우리 후손의머리로 돌리라는 유대인들이 그 이후 그 댓가를 혹독하게 받는다.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도 하나님게 큰 특권을 받았으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원흉이 된다. 기룟 유다는 돈 때문에, 헤롯은 정치적인 문제로 예수님을 죽였고 당시 이단과 우상숭배자도 많았지만 가야바는 예수님 죽이는 일에만 열심을 다했다. 이단 우상 숭배자들도 민족을 미혹했지만 예수님 죽이는 일에만 정력을 쏟은 것은 시기 질투 때문이었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 선교하는 것이 당시 전세계에 알려졌다.

젊은이들의 모델이 되었다. 그 때 하버드 대학생이 슈바이처를 섬기며 따르겠다고 아프리카로 간다. 그런데 슈바이처가 만나주질 않는다.기다려도 불러주질 않는다. 돌아가려니 비가 와서 홍수가 가난한 사람들 마을을 휩쓴다. 나병걸인 어린 환자가 떠내려가자 구원해내니 그 때서야 슈바이처가 부른다. 의술, 기술, 능력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 그리하여 동역자로 삼았다 한다.

지식인, 경제인, 의료인, 지도자가 아니라 국민의 아픔을 헤아리는 사람이 없기에 문제가 생긴다. 사회적 혼란만 부추긴다. 이 모든 것이 시기 질투 때문이다.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이다.

대학 입시 시험에 7명의 학부모가 모여 기도한다. 그 중에 여섯명이 합격하고 한명이 떨어졌다. 떨어진 엄마가 합격한 여섯명을 불러 축하 잔치를 벌린다. 그리하여 여섯명의 부모가 그 아이를 위해 열심히 기도한다. 그 다음해에 그 아이가 서울대로 간다. 베푸었더니 좋은 일이 생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떨어졌어도 축하할 수 있는 마음이 인간으로서는 힘든 일이기에 간증서를 썼다 한다.

 

하버드대 헬리누엠교수가 중도에 사임한다. 데이브레이크 요양원의 직원이 되어 기저귀 갈고 밥먹여주기 위해서이다. 노년까지 보장된 교수직을 사임한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비트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가장 큰 자유는 죽음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분노의 마음도 가질 수 있지만 감사의 마음을 선택했다 한다. 당시엔 이젠 죽어도 좋다는 감사의 마음에 죽음이 두렵지 않았고 살아남아 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한다.

 

본문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이 쫒겨난 것은 시기 질투 때문이다.

사라가 질투했다면 애초에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아브라함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 뿐이었다.  그러나 큰 은혜를 입은 여종이 거꾸로 주인 사라를 멸시한다. 정실은 섬김이자만 후실은 질투이다. 그것을 본문은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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