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의 분노
160814 조원형목사님
심리학자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란 책이 있다.
사랑이나 선이 기본 자세가 안되어있으면 사랑이 사랑일 수 없고 선이 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고주는 것이라는 상식 정도는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기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선이 악이 되고 시험이 되고 사랑이 부담이 되고 아픔이 된다.
이 책에서 세가지를 지적한다.
먼저, 주긴 주되 계산적으로 준다.
수동적으로 피동적으로 주지만 자본을 투자하듯이 이익을 받을 것을 생각하고 준다. 자녀들에게 용돈을 줄 때 언제 어디서 얼마를 줬다고 적어 놓는다. 자녀들이 왜 적느냐 물으니 이 세상엔 공짜가 없다, 세상 사는 방법이다 말한다.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이고 콩심은데 콩나게 하시고 팥심은데 팥나게 하시는 분이라 말한다. 어느 날 아들이 돈을 달라 하여 주니까 아들이 고맙다는 말보다는 나중에 이자까지 갚겠다면서 감사보다는 불만한다. 그리하여 다시 깨닫고 그냥 준다. 분노 불평 원망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없다. 거지에게 주면서 그 공로를 하나님께 받는다면 온전한 사랑일 수 없다.
둘째, 주는 것을 희생으로 생각한다.
자식에게도 내가 못입고 못먹으며 자식에게 준다 하지만 자식이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 없고 부담이 된다. 내가 사랑을 주고 선을 행하면 그것 자체가 복이다. 다음에도 이렇게 줄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라고 유대에서는 가르친다.
성경 본문에서 탕자의 입장이다. 동생은 아버지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자신은 아버지 집에서 대ㅏㄴ한 공로로 생각하여 아버지를 먹여살리는 것으로 착각한다. 사랑의 열매가 행복인데 내 공로가 대단히 크다면서 희생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사랑이 부담되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세째는, 내것이 다 네것이라 생각한다.
사마리아 사람은 내 것이 다 네것이라는 마음으로 강도만난 이스라엘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다. 내것을 너에게 다 주지 않는 것은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모는 주는 것이 좋아서 베풀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아픔, 멸시, 충격, 상처를 준다.
"사랑의 기술"이란 책에서 이러한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 이해 용서를 베푼다면 어떠한 마음으로 베푸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시며 기뻐하신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는데 용서뿐 아니라 잔치까지 베푸는 사랑, 새사람된 것에 기뻐하는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이 많은 결실을 맺는다. 탕자의 형은 매사에 의인이고 공로자로 착각하며 일하는 것이 문제이다. 많이 베푸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자랑하면 결국엔 부담이 된다. 탕자가 집을 나간 후부터 큰 아들은 얼마나 불평했겠는가. 그러나 탕자는 돌아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다.
구약 창세기 노아의 방주이야기에서 방주의 크기가 얼마나 커서 120년이나 지었는가. 정한 짐승 일곱쌍, 부정한 짐승은 2쌍씩 들어와 지내게 한다. 모세가 태어날 때 히브리 사람이 태어나면 모두 죽이라는 애굽왕의 명령에 모세의 부모들은 기도하며 숨겨서 키운다. 결국 자라면서 하나님께 맡기며 바구니를 만들어 강물에 띄운다. 이 바구니도 노아의 방주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작지만 노아의 방주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테바"라 부른다. 무동력의 강물흐르느대로 방향 속도 정착지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으로 동일한 "테바"라 부른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며 젊었을 때 계획하고 추진하지만 50대가 넘어서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한다. 노, 방향감각, 정착지를 계획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한다. 모세의 갈상자처럼 "테바"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며 살자. 돌아온 탕자는 이 믿음으로 돌아왔지만 탕자의 형은 자기 의지대로 헌신과 희생을 하지만 자기 입으로 깨버리고 만다. 입이 앞장서는 바람에 행한 선이 악으로 변한다. 삶의 지혜, 겸손, 인내가 없다.
할아버지가 종이 호랑이를 접는다. 호랑이 배에 메뚜기를 넣었다. 메뚜기는 콩튀듯팥튀듯 하지만 얼마후 메뚜기는 죽었다. 그다음엔 개구리를 넣는다. 개구리입을 봉해버린다. 그런데 개구리는 종이호랑이 꽁무니로 나온다. 이러한 지혜가 필요함을 손자에게 가르친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뻐하고 앞장서서 동생을 위해 잔치했으면 좋았을텐데 흑백논리로 아단치고 자신의 잘못은 변명하는 삶이다.
한 집에서 산양을 키우는데 아침저녁으로 우유를 짜서 가족에게 먹인다. 편안하게 살면서 자기가 제일인 줄 안다. 그런데 나귀가 짐을 지고 여행을 다녀온 후 목욕을 시키고 좋은 풀도 준다. 주인의 나귀 사랑에 질투하여 나귀에게 말한다. 고생하는 나귀에게 짐을 싣고 가다가 웅덩이에 일부러 넘어지라 그러면 다시는 짐지우지 않을 것이다 말한다. 이에 나귀가 그대로 했더니 다쳤다. 이에 주인집 생활터전이 되는 나귀를 위해서 산양을 잡아 다친 다리를 고친다. 사람이 살면서 시기와 질투는 거꾸로 자신에게 해가 된다.
대대로 누리는 복을 차버리는 것이 사라의 몸종 하갈이다.
여주인 대신에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아 키울 수 있는 복으로 감지덕지해야 하는데 시기와 질투 때문에 쫒겨난다. 프랑스의 발자크는 질투하는 자의 고통이 매우 크다,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옆 사람의 행복 때문에도 고통을 겪는다고 말한다. 순수한 사랑, 사랑의 기술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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