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170122 조원형목사님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사도행전 26:24~32)
중세 시대 이전에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신앙인들은 삶을 자제하고 헌신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 외 사람들은 철학적 삶으로 자신을 살았다.
고대 디오게네스는 두가지가 알려진 철학자이다.
전혀 욕심이 없고 집도 없었다. 속이 텅빈 큰 나무통 아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통나무 밖에 나와서 사람들에게 철학을 전했다. 당시 알렉산더 대앙이 들은 바 있어 찾아가보니 통나무에서 나와 있는데 옷은 남루했지만 얼굴은 근엄하였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왕으로서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 하니 디오게스의 대답이 왕께서 조금만 비켜서주십사, 태양빛을 가려서 조금 춥다 한다. 내가 알렉산더 왕이 아니라면 디오게네스와 같이 되고 싶다 한다.
작은 욕망 욕구가 있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하다.
신앙인으로서 모든 욕망을 버릴 수는 없지만 기초적 욕구마저 거절하고 만족한 삶을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비천하게 보이는 디오게네스를 보며 대단한 학문을 가졌으면서도 어려운 역경소겡서도 왕 앞에선 사도바울이 오늘의 본문 말씀이다. 묶여서 왕 앞에서 재판받는 것 외에는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이다. 신앙인으로서 고충 갈등 낙담할 때 피곤하고 지칠 때 자신의 환경 삶이 어떻든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행복해 하는 사도바울이다.
요즘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는 경우를 많이 본다.
자신의 주차장선에 다른 차가 서 있다. 겨우 차를 대고느 화가 나서 앞 차를 발로 차버린다. 그 다음날 그 차가 자신의 차와 같이 주차할 때 시비가 붙는다. 자신은 신앙인이다. 짜증나고 다툼도 있을 수 있지만 먼저 깨닫는다. 다음날 잘못 주차한 차에게 편지를 써붙여놓는다. 어제는 회사일로 기분이 안좋아서 참아야하는데 당신과 다툰 것을 후회하며 미안하다는 글이다. 그 이튿날 보니 차에 편지가 꽂혀있다. 나도 미안한 마음이라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화해한다. 신앙인도 다른 사람과 동일하지만 먼저 깨닫는다. 믿음 감사 사랑이 있다. 남을 배려한다. 여유를 보인다.
예수믿는 사람들도 역경 어려움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담겨져 있어 연단으로 깨닫고 감사하며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
재판하는 왕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말하기 보다는 자신의 신앙인 하나님을 증거한다. 무당 박수들의 소원은 자신의 가족 중에서 절대로 자신과 같은 무당 박수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고통과 저주스런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사는 자신의 대를 이어 목회자가 나오길 기대하고 성도들의 유언조차 하나님 믿기를 원한다. 스스로 경험하고 체험하기 때문이다.
하버드대학 비지니스 스쿨에서 활동학생의 논문이다.
'훼밀리 비즈니스'에서 가족 관계가 원만하고 성숙되고 유익한 사랑으로 포용될 때 사회 생활도 풍요롭고 포용하고 배려한다. 사람이 노력해서 이룬 인생도 가족 관계가 그 여파를 미친다. 한 인물이 나기까지는 3대에 걸쳐서 교훈하고 그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신앙인으로서 오늘을 사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가정 교육이 나를 만들었다. 자신에게 행복감이 있어야 배려감이 나온다. 디모데후서 1:5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여진 것은 네 외할머니로부터 신앙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라 말씀한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계속 자라고 있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 속사람이 깊어지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자라며 신앙이 자란다.
기독교 집안에서 아버지가 술 중독자로 산다.
아버지가 술로 인해 병을 얻어 유언으로 너희들은 숭을 먹지 말라 하고 운명한다. 장례후에 보니 큰 아들이 만취하여 목사님을 찾아온다. 아버지를 봐서라도 술을 안먹으려 했는데 피는 못속이는 것 같다면서 통곡한다. 입만 가지고는 자녀 교육이 안된다. 스스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어느 자리에서든지 묶여서 재판받는 자리에서도 핍박받는 것 외에는 나와 같이 신앙인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란다는 사도 바울의 말이 진리를 전하는 신앙인이다. 다른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도 내 신앙의 행복이고 만족이다. 충만한 믿음이 없을지언정 나를 다스릴 수 있고 감사가 있으면 세상 유혹 욕망을 뿌리칠 수 있다.
"육척항"이란 것이 있다. 여섯자 골목이란 뜻이다.
청나라 강리제가 통치할 때 재상 장영이 있는데 고향에서 편지가 왔다. 옆집 사람이 장영의 땅을 침범하여 집을 지었는데 편지 하나라도 보내어 자기 땅에서만 집을 짓도록 하라고 집안 사람이 편지한 것이다. 이에 땅 몇평 때문에 이웃과 다툴 수는 없다. 석자를 줄여서 경계를 만들라 한다. 그 사람도 감동받아 3자를 양보하여 6자 골목이라 부른다. 먼저된 사람이 나중된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신앙에 넘쳐 감사함으로서 육신의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 아니라 감사와 감격으로 이겨나갔다.
우리 신앙인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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