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자의 고백
170402 조원형목사님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편 119:97~104)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인가. 지체 문제, 저능아, 귀머거리, 장님....그 중에서도 예수님 시대 당시의 귀신들린 사람이다. 판단 의식이 없으며 귀신에게 일생을 착취당한 사람이다. 그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이시다.
현대는 중독이다.
중독은 자신의 권리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팔아버리고 사는 사람이다. 처음엔 선택권이 있다. 할꺼냐 말꺼냐, 처음엔 좋아서 피난처처럼 찾다보니 담배 술을 찾으며 함정에 빠지고 헤어나지 못해 중독되고 인생을 송두리채 착취당한다.
어리석은 현대인의 모습이다.
우리는 죄의 노예이다.
당시 로마의 노예는 시민권자보다도 3배나 많았다.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환경에 의한 노예들은 서너가지 기회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남 작은 돈, 보상은 있었다. 자기 권리를 사서 자유인이 되기도 했다. 또 도망가서, 또는 주인이 노예를 값을 지불하여 사서 풀어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중독은 술과 담배, 마약만이 아니다.
스마트폰 중독도 있다. 인터넷 등이 생활의 범위를 넘어 정신을빼앗는다. 현대인들의 정신적인 병 중독에서 불행한 삶을 산다.
본문은 진정한 자유의 삶이 무엇인가 말씀한다.
맛이란 음식만이 아니다. 이성에서, 삶에서도 사용한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의 맛이 꿀송이 맛보다도 더 달다고 말씀한다.그런데 꿀만을 먹다보니 병도 생긴다. 한가지만 집중해서 좋을 것이 없다. 40일을 주리고 시험받으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의 맛도 느낀다. 맛있고 깊이있고 행복한 맛이 하나님의 말씀의 맛이다.
중독의 3단계가 있다.
먼저,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독사의 굴로 들어간다. 맹수와 싸우다가 피해서 도망간 곳이 독사굴이다. 먹는 것 입는 것 표현도 자제해야 한다.
둘째, 지식의 노예이다. 지식이 삶을 밝게 하지만 지식을 종교화시킨다. 철학과 지식의 노예가 되어 그들에게 다른 것이 들어가질 않는다. 습관과 아집이다. 이로 인해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째, 종교적인 노예이다. 사단교는 무당이나 박수,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이단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사람을 섬긴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질 못한다. 사단교에서는 자신의 후손이 자신처럼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단에 빠진 자는 그 자체도 모른다.
윤회설이 있다.
내가 전생에 죄가 많았다고 말한다. 이 땅에서 공을 많이 쌓고 덕을 쌓으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사람으로 태어나고 부잣집에 태어나도 그 사람이 전생에 선을 베푼 사람같지가 않다. 상당한 호화 속에서 태어난 사람도 성자같은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나폴레옹 폴이 성공의 법칙을 말한다. 성공이란 보람있고 후회없이 사는 삶을 말한다.
먼저, 한가지에 집중하고 말씀에 순종한다. 유혹과 시험을 뿌리친다.
둘째는, 긍정적인 안목이다. 대선 후보들이 서로를 깎아내린다. 깎아내리고 트집잡는 사람이 대중 인기를 얻는다. 그런 그가 선한 도구로 사용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세째, 작은 일에 성취감을 얻는다. 큰 꿈을 가지고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소중하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공회원이 될만큼 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는 그 지식, 공회원 자리를 버렸다. 도망다녀야 하고 입고 먹을 것도 제대로 하질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에게 잡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잡고자 노력한다고 말한다. 빌립보서에서의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본문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맛은 단계적이다. 듣는 것으로 믿음은 시작된다. 그것만으로는 말씀이 꿀송이가 될 수는 없다. 이 말씀도 맛있고 저 말씀도 맛있다는 것이 아니다. 글을 읽고 소설을 읽어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도 두번세번을 보는 경우가 있다. 듣는 것 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를 아는 것이다. 주일학교에서 가르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 아이들이 스스로 찾을 때에야 그 맛을 느낀다. 시편1편의 "묵상"은 실천하는, 행동하는 신앙이다. 꿀송이보다 달다는 것은 행동했기에 느끼는 맛이다. 추상적이 아니라 체험한 맛이다.
한국 갤럽 조사 결과이다.
한국 교회의 십년 후에는 침체되고 부흥이 끝나고 위험한 지경에 이른다. 왜 그런가.
먼저, 무늬만의 성도, 겉보기만 그리스도인이다.
둘째, 교회, 성도가 잃어버린 것은 사랑이다.
세째, 비판적이 단체로 교회가 타락했다.
사랑이 있으니 허물 잘못도 덮고 가족이 함께 산다.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감싸고 덮어주고 함께 하는 것이다. 조건만 내걸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맛이 체험의 신앙이다.
당시 파피루스에 기록했다.
문명이 발달하여 종이 조각을 하며 말씀이 기록되었다. 유대인들이 가르치는 것은 밀가루에 꿀을 섞어 반죽한다. 거기에 기록하여 아이들이 읽고 암송하고 그것을 먹는다. 유대인들의 지혜이다.
이해가 안간다.
수십년을 경험한 어부에게 전혀 경험이 없는 예수님이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한다. 머리로 믿으면 불만이다. 가슴으로 믿어 순종한다.
불평자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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