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하나님의 섭리
(비전과 섭리의 사람 요셉 2)
180218 주승중목사님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창세기 37:18~28)
오스왈드 샌더스 목사님은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계획이다'라고 말한다.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이 살 집을 짓고싶어한다. 집을 지을 때는 건축가에게 맡기는게 아니라 자기가 이미 많은 부분을 그려놓고 세심한 손길이 필요한 부분만 도움받는다. 처음부터 전문가인 건축가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설계도면을 그려놓고 뭔가 막힐 때만 건축가에게 맡긴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건축가는 이집은 자신이 설계한 것이 아니라고 책임지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내 인생의 건축가로 여기고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많은 이들이 자기 인생의 집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집을 짓다가 뭔가 막히고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찾는다. 그렇다면 자기가 계획하고 살다가 자기 마음대로 인생의 집을 짓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오늘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그 고난에 동참하기를 다짐하는 사순절 첫번째 주일이다.
본문 말씀은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해서 은 이십세겔에 팔아버린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산 이유 세가지가 있다. 창세기 37:2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즉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 야곱에게 그대로 전했다는 것이다. 형들의 입장에서 보면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했다는 해석이지만 잘못된 해석이다. 잘못이란 단어가 도덕적으로 악한 행동을 말한다. 요셉은 사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성경 어디에도 부정적인 의미로 나오지 않는다. 둘째로, 아버지 야곱이 편애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37:3에서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라고 나온다. 채색옷은 상속자에게 주는 옷이었다. 사랑하는 부모의 차별은 자녀들에게 상처이다. 세째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결정적으로 미워한 이유는 요셉이 꾼 꿈들로 인해서이다. 창세기 37:5에서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라고 나온다. 비록 이 꿈이 요셉의 야망을 보여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이었다. 창세기 37:2에서처럼 요셉이 17세의 소년 즉 아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 아이로서 이 세가지 이유로 인해 형들이 더 분노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오늘의 본문 18절에서는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형들은 요셉을 죽이기로 꾀했다. 악한 짐승이 잡어먹었다고 하자한다. 성경에서 여러사람 즉 한 패거리가 한 사람을 죽이려 했던 첫 장면이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해서 돌로 죽인 것은 개인 대 개인의 살인이다, 형들은 동생을 혼내줄 수도 있었는데 혈육인 동생을 죽이려고 계획했다. 동생을 죽여버리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 그 꿈이 사실이 아니라는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죽여버리자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계시의 꿈을 꾸게 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배신한 행위이다. 하나님 앞에서 지은 범죄 행위이다.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졌다. 본문에서 구덩이란 단어가 5번 등장한다. 구덩이는 수조처럼 입구는 좁소 속이 넓은 넓은 항아리 모양이다. 그 속에는 물이 없었다. 유대의 미드라쉬(랍비들이 시나고가(회당)에서 성경에 대한 주석과 해설을 하는 것을 미드라쉬라 하였다)에 보면 구덩이 안에는 전갈 뱀 등이 있었다. 요셉은 캄캄하고 깊은 구덩이에 던져진 것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나중에 형들이 회상하는 장면이 창세기 42:21에 나온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다, 그가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여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한다고 생각한다. 시기 질투 미움으로 마음과 양심이 마비되었고 동생을 구덩이에 넣고도 음식을 태연히 먹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루기 위한 섭리에 의해 일말의 양심이 남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20세겔에 노예로 팔아버렸다.
요셉이 당한 이 모든 고난은 하나님께서 증조부였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계시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창세기 15:13~14)
요셉이 이 억울한 고난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고난이었다. 만일 형들과의 갈등이 없었다면 노예로 팔려가지 않았을 것이고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받지 않았다면 그는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요셉이 이 고난을 받지 않았다면 바로의 꿈도 해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죽음의 구덩이에 던져졌고 애굽으로 팔려가고 보디발 아내에게 모함당하고 감옥에 가고 거기서 술맡은 관원장을 만나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총리가 되었다.
요셉은 그 죽음의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께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물었을 수도 있다.
요셉은 야망이 없었다. 문제라면 형들과 편애한 아버지였다. 요셉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이었다. 요셉의 잘못은 없었다. 잘못은 그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께 있다.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다. 아버지 말씀에 순종해서 세겜을 거쳐 도단까지 형들을 찾아갔다. 지도를 보면 헤브론에서 세겜까지 80km이다. 세겜에서 도단까지는 20~30km이다. 요셉이 저런 고난을 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였다. 더 큰 축복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주관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7항에 나온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항상 지니고 계신 전능하신 능력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하늘과 땅과 모든 만물을 붙드시고 다스리신다. 따라서 꽃잎과 풀잎,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양식과 음료, 건강과 질병, 번영과 궁핍, 이 모든 것들이 사실상 우연히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애로운 손길로부터 오는 것이라 설명한다. 전능하신 섭리의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마침내 승리하기를 바란다.
요셉의 고난은 예수님의 모형이다.
팡세의 저자 파스칼은 그리스도는 요셉에 의해 예시되었다, 즉 그는 죄가 없었고 그의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그의 형들을 만나도록 아버지의 보냄을 받았고 근 이십에 팔린다. 이것을 통하여 그는 그들의 주, 그들의 구원자, 이방인의 구원자와 세계의 구원자가 된다. 그를 파멸시키려는 그들의 음모, 팔아넘김, 그리고 그들의 그에 대한 거절이 없었다면 이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먼저,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형들에게 보냄을 받았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요셉을 형들에게 보냈다.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둘째, 요셉은 끝까지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했다. 세겜에 가보니 형들이 떠나고 없었다. 그는 도단까지, 끝까지 형들을 찾아 더 올라갔다. 빌립보서 2:8에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목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세째, 요셉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형들에게 억울하게 고난을 당했다. 죄없으신 예수님도 억울하게 죽으셨다.
네째, 요셉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은 20세겔에 팔렸다. 예수님도 은 삼십냥에 팔려가셨고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다. 사순절, 마침내 예수님은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셨다.
우리 가운데서도 사망의 음침한 구덩이에 억울하게 빠진 이가 있는가. 요셉의 구덩이처럼 내가 이렇게까지 어려움을 당할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나에게 왜 이런 고난이, 왜 하필이면 접니까. 왜 하필이면 우리 가정입니까 원망하지 말자.
여기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바라보았던 한 남자가 있다.
아더 애쉬는 테니스로 1960년대와 70년대를 주름잡던 사람이었다. 모든 테니스 선수들의 꿈인 그랜드 슬램 즉 US오픈, 프랑스 오픈, 오스트리안 오픈, 그리고 영국의 윔블던 경기에서 세번이나 우승했고 그 중 한번은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에서의 우승이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아더 애쉬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인해 발목이 잡혔고 두번이나 수술을 받게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수술중에 받은 수혈로 AIDS에 걸린다. 결국 1993년 그의 나이 50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AIDS에 걸렸음이 갈려졌을 때 전 세계 팬들은 수많은 편지를 보낸다. 그 중의 한 편지에 이런 질문이 적혀있었다. '왜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같이 나쁜 병을 걸리게 했나요' 아더 애쉬가 AIDS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다음에 누군가 보낸 편지였다. 아더 애쉬는 이렇게 답한다. '전 세계적으로 5천만명의 어린이들이 테니스를 친다. 그 중 5백만명이 테니스를 정식으로 배운다. 그중 50만명이 직업선수가 된다. 그중 5만명이 리그전에 참여한다. 그중 5천명이 그랜드슬램 대회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다. 그중 50명이 윔블던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다. 그중 4명이 준결승에 진출하고 그중 두명만이 결승전에 간다. 만일 내가 심장마비 혹은 AIDS에 걸린 것을 두고 왜 접니까 묻는다면 내가 받은 축복에 대해서도 왜 접니까 물어야 한다. 그로 인해 받은 모든 기쁨과 권리에 대해서도 왜 접니까 물어야 한다. 만일 나의 승리에 대해 왜 접니까 묻지 않았다면 내게 좋지않은 일이 생겼을 때에도 왜 접니까 묻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아더 애쉬의 '은총의 나날들(Day of Grace)'에서 말한다.
우리에게 우연은 없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만 있다. 인생의 고난이 찾아오면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기보다는 Why me? 하나님, 왜 접니까, 왜 하필이면 우리 가정입니까 원망하고 묻는다. 우리도 요셉처럼 고난의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울부짖으셨다. 그런데 연약한 우리가 어찌 탄식하지 않겠는가.
절망과 저주의길 인줄 알았던 애굽의 길이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졌듯이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그 분의 섭리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로마서 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지금 내가 당하는 시련과 억울함은 반드시 선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후에 우리 삶을 돌아볼 때 그랬군요 그랬군요 감사함으로 돌아볼 수 있기를 축원한다.
지금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고난 가운데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하옵소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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