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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주승중목사님

180930 (요셉의 죽음과 믿음이 주는 교훈 1)

요셉의 죽음과 믿음이 주는 교훈 1

(비전과 섭리의 사람 요셉 26)


180930                                          주승중목사님


....요셉이 백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창세기 50:22~26)

한태환목사님의 예화집이다.

한 사람이 공원 묘역에서 묘비에 쓰진 글을 읽고 있었다. 그 묘비에는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렇게 서서 웃고 있었소.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이렇게 써 있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다가오는 죽음에 준비해야 한다.


오늘 말씀인 창세기 마지막장 마지막절은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로 끝이 난다. 왜 입관으로 끝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기록되어 있다. 생명의 탄생으로 시작된 창세기의 마지막절은 죽음과 입관으로 끝나고 있다. 빛과 생명으로 시작된 창세기가 왜 죽음으로 끝나고 있는가. 빛과 생명의 창조로 시작된 창세기가 요셉의 죽음으로 끝난다.


빛과 생명의 창세기가 3장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범한 내용이 나온다. 인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에 영생하도록 지으심을 받았는데 죄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다.

창세기 3:4에서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먹지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 열매를 먹고 그 죄로 인해 죽게 되었다.

창세기 3:19에서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로마서 3: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6:23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른다. 죽음앞에서는 수많은 생명들을 구원했던 요셉도 결코 예외일 수 없었다. 사무엘상 20:3에서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말씀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오늘 요셉의 입관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사랑하는 아내, 자녀, 부모님조차도 내 생명을 1분도 더 연장시켜 줄 수 없다.  시편 90:`10, 12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죽음을 준비하는 삶, 내가 언제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가야 함을 생각하고 단한번 주어진 우리의 소중한 삶을 책임있고 의미있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요셉이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사명을 다하는 삶을 살아 주님 부르실 때에 복된 마감을 하기를 원한다.

시편 116:15에서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요한계시록 14:13에서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 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진정 바라기는 성도들의 생의 마지막 순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복된 귀중한 것이기를 축원한다. 우리에게는 죽음 후에 돌아갈 영원한 본향이 있다.


창세기 50:24에서 말씀한다.'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1차 본향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 가나안이다. 애굽이 그들이 영원히 살아가야 할 본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셉은 유언한다. 애굽에 묻지 말고 입관만 하라. 나중에 가나안으로 돌아갈 때 나의 유골을 메고 가라. 그는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잊지 않고 약속의 증거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신을 본향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죽는 순간에도 내 유골을 메고 올라가라는 유언을 남겼다. 창세기 50:25에 나온다.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약속의 말씀은 출애굽 때 이루어졌다. 출애굽기 13:19에서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여호수아 24:32에서도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여호수아가 마침내 가나안땅을 다 정복한 후에 요셉의 유골을 세겜땅에 묻는다. 세겜 땅은 야곱이 특별히 요셉에게 물려준 땅이다. 창세기 48:21~22에서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요셉이 이렇게 죽는 순간까지 본향을 바라보았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가나안땅, 영원한 본향,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죽음을 귀히 바라보시는 이유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장례식이 영원한 이별이기 때문에 영결식이다. 죽음  후에는 영원한 심판이 있다. 히브리서 9:27에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한계시록 20:12,15에서도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요한계시록 21:8에서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둘째 사망은 육신의 죽음 이후에 심판을 통한 영원한 사망을 뜻한다.


누가복음에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오는 것처럼 천국과 지옥은 도저히 서로 건너갈 수 없는 곳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그 앞에 멸망만이 있을 뿐이다.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본향이 예비되어 있다.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6:47~48에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요한일서 5:13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 죽음은 영생의 삶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영원한 본향을 소망가운데 기쁨으로 맞이하게 된다. 잠언 14:32에서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의인에게는 우리에게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본향이 있기에 죽음조차도 소망이 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제6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아주 초라한 집에서 노년을 보내었다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늑골도 허물어지고 겨우 지팡이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한 친구가 오랫만에 그의 집을 방문했다. 집의 벽은 허물어지고 지붕은 누더기처럼 낡은 것을 보고 친구는 깜짝 놀랐다 바람이 불면 사방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가 애덤스에게 말했다. 미국의 대통령까지 지낸 분이 어떻게 이런 초라한 집에서 지낼 수 있는가. 이 집은 매우 위험하다고 말한다. 이에 애덤스는 대답한다. 바람에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가끔은 관현악단의 연주로 들릴 때도 있단다. 그러나 이제는 집이 위험해서 다른 곳으로 이사할 생각이라 말한다. 이에 어디로 이사를 가시는가 물으니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저 곳으로...' 하늘나라는 영원한 본향이다. 하늘의 소망을 품은 사람은 세상의 고통을 하찮게 여긴다. 애덤스는 참된 소망을 가지고 본향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이 땅의 것들에 연연하지 않았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 모든 인생의 수고를 마치고 영원한 본향에서 주님이 예비하신 장막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우리는 참된 소망가운데서 산다. 고린도후서 5:1에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말씀한다.

요셉은 애굽에서 93년을 살았다. 애굽으로 팔려가 13년은 감옥 노예생활을 했지만 나머지 80년은 부와 영광 가운데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그 땅에 묻힐 생각을 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모두가 부러워해도애굽에서 만족해하며 안주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본향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을 믿었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목사가 된 존 헨리 뉴먼은 당시 영국 국교회의 무능력과 지도자들의 비리를 척결하는데 온 정열을 쏟았다. 너무 무리한 나머지 그는 몸을 상하게 되어 32세에 이탈리아의 시실리섬에서 요양을 한다. 병약했던 그는 거기서 열병에 걸려 살아날 가망이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몸을 미처 다 추스리기 전에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배를 탔다. 돛을 달고 바람으로 가는 범선이었다. 바람이 불지 않으니 배는 움직이지 않았다. 뉴먼은 빨리 가자고 선장에게 재촉했고 선장은 바람이 불어야 간다고 대답한다. 바람불기를 기다리다가 또 재촉했고 선장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바람을 보내주셔야 빨리 가지요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바람을 믿고 기다리라 말한다. 뉴먼 목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인도해 주셔야만 갈 수 있다는 선장의 말에 감동받고 고향에 돌아와 그 때의 기억을 생각해 찬송시를 지었다. 찬송가 379장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이다. 내 가는 길 다 알지 못하나 한 걸음씩 늘 인도하소서 찬양한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때로는 한걸음, 한치앞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빛되신 하나님께서 한걸음 한걸음 인도하실 것이다. 지난 주 명절에 다녀온 고향은 영원한본향이 아니다. 이 땅은 내가 영원히살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돌아갈 본향이 없는 것처럼 이 땅의 것들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뭐가 그리 분하고 억울한가. 꼭 사과를 받아야 하나. 꼭 그걸 이 땅에서 받아야 하나. 우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신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한걸음 한걸은 인도하시는 주님 손 꼭 붙잡고 이 모든 밤 다 지나고 저 밝은 아침에 기쁨으로 내 주를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