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더욱 유익한 것
181125 조원형목사님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
(빌립보서 1:19~26)
사람이 품을 수 없는 것을 품었다가 그걸 꺼내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난 다음에 겪는 허탈감이 지난 1년의 삶이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다.
내 삶, 내 생애 전부를 쏟아붓고 살다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난 다음의 삶은 허탈감, 방황이었다. 건강했던 선배 은퇴한 목사가 은퇴후에 2년만에 소천하신 친구 목사도 있다. 그 갈등 방황 허탈감 낙심을 오늘 본문에서 본다. 생애 생존에 대한 갈등 허탈 고민에 대한 해답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겪는 갈등 허탈감 아픔에 대한 해답을 고백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명의 의미요 삶의 의미로 삼는다. 사도 바울이 복음 전도자가 되어 삶의 고민 갈등도 느꼈지만 희열 기쁨도 발견하며 살았다. 얼리야도 아합왕에게서 핍박받으며 생존에 갈등도 극심했지만 자기 사명을 다하지 못해 갈등 낙담도 있었다.
사람은 이런 순간이 온다. 직장에서 갈등 고민도 있지만 그건 쓰여지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치유가 된다. 쓰임받는 감격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직업 현장에서도 겪는 일이다. 쉬고 싶고 물러나고도 싶지만 그 현장에서 존재함으로 위로받고 새 힘을 얻는다. 그런데 막상 모든 일을 내어놓고 은퇴하고 물러서면 갈등 시련보다도 차라리 죽는게 낫다 생각한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기에 대한 해답이다.
사도 바울이 시련을 겪고도 생명의 가치, 삶의 의미로 위로를 받았지만 이제 감옥에 갇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날의 갈등과 고충을 생각해 보았는가. 이 때 겪는 좌절 절망 회의 열등의식이 얼마나 컷겠는가 생각한다. 차라리 스데반 집사가 부럽다. 차라리 그 때 죽었더라면 지금까지 살아서 이런 존재가 되었나. 사도 바울에게는 대단한 고민이었다. 이 때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삶의 이유를 명확하게 가르치신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생존의 가치를 깨닫고 편지를 쓴다.
윤리학자 슐레이어는 저서"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에서 죽음보다 중요한 3가지를 말한다.
먼저, 쾌락적 가치이다.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고 삶의 이유 목적 보람이다. 그러면서 보람을 느낀다. 집에 들어가면 지하주차장 옆켠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들을 본다. 집안 가족들을 위해 이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이다.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 이도 있다. 이해는 간다. 거기서 위로받고 삶, 생존의 의미를 발견하며 산다.
둘째는, 생명적 가치를 기준에 두고 산다.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인가. 그런데 너무 생명적 가치를 높이다보니 옹졸 치졸 비굴해지고 절대 모험은 안한다. 위험한 때 숨고 피한다. 그들을 사람답지 못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생명이 기준이다.
세째, 정신적 가치 기준이다.
철학 윤리 생명보다 더 높이 가지는 가치 기준을 기준 삼고 사는 사람들이다. 사회에서는 인격자, 하나더 붙이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가치 기준,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사람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의 시험의 연속이다. 예수님은 시험으로부터 사역이 시작되었다. 사람이 판단이 서 갈 때에 시험이 시작된다. 시험 과정을 거치며 성숙 연단,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연속된다. 그 시험을 당할 때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 오직 신앙이다. 그 시험의 때에 바른 선택을 못할 경우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까지도 상실한다. 천국에 가서도 선택의 자유를 주신다. 영원하다. 그런데 그 자유가 박탈될 경우가 있다. 사탄에 속아 박탈되고 영원히 죽어서도 선택의 자유가 상실된다.
쾌락적 가치 생명적 가치 정신적 가치 이 선택의 기로는 평생을 지속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말씀의 기준이다. 그리고 말씀을 곡해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경을 오해하여 잘못된 인생을 사는이도 많다. 살면서 신령한 가치 기준을 가지고 산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한가지를 더 말씀한다. 그리스도와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사는 삶의 가치이다.
나는 살 가치가 없지만 가족 자식을 위해서 산다는 가치감, 용기, 감사 감격을 얻는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내가 존재 이유, 삶의 이유에 대한 해답을 알려준다.
현재냐, 미래냐. 나이 어린 아이들은 부모가 내일과 미래를 말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성숙해가며 오늘보다 귀한 날이 내일이며 미래임을 깨닫는다. 산업 사회에서도 오늘의 만족보다도 내일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 옛날 농사 시대에도 씨앗을 먹지 않은 것은 미래 때문이다. 농사 시절 굶다가 종자 씨앗을 꺼낸다. 조금이라도 덜어서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할머니를 가족으로서 보았다.
두번째 선택은 나를 위한 것인가 남을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이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남을 위한 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나이들어 깨닫는다. 좌편뇌와 우편뇌가 다르다. 눈도 둘이고 코도 둘이다. 팔다리도 그러하다.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한의학에서 오른쪽을 치료하기 위해 왼쪽에 침을 놓는다.
세번째 선택은 육체를 위한 것인가. 영을 위한 일인가.
사람을 위한 일인가 하나님을 위한 일인가. 하나님을 위한 일이 나를 위한 일이 된다. 교회를 위한 것이 나를 위한 일이 된다. 나만 복받고 나만 평안하면 후일에는 화가 됨을 경험한다. 사도 바울이 오늘 사는 이유를 말씀한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 보람으로 알았는데 이제 감옥에 갇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만나러 갈 수도 없고 만나러 오는 사람도 없다. 이런 대에 자신의 생존의 가치가 교회를 위하고 성도들을 위한 것임을 깨닫는다. 살아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생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기쁨이 됨을 깨닫는다.
내가 살아있음으로 가족에게 위안이 되고 교회에게 평안이 된다.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얼마나 유익이 될까. 내가 고통을 겪고 치욕을 겪는 것이 성도들에게 유익이요 기쁨이 된다. 자신은 지금 당장 천국에 가고 싶지만 지금 자신의 존재의 이유가 성도와 하나님께 영광드리는 것보다도 이 땅에서 내가 존재함으로 가족 교회 성도에게 위안이 되고 기쁨이 됨을 깨닫는다.
지금은 고통 치욕이지만 성도들이 위안으로 삼고 교훈으로 삼고 하나님은 기쁨으로 삼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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