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자의 신앙
190414 조원형목사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태복음 21:1~11)
이 세상을 살면서 배우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미숙하고 미천한 사랑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그 사랑을 배운다.
또 한가지 배우는 것은 고난이다. 시편 119편71절이다. 고난속에 감추어진 비밀에 감사 찬양 노래한다.
오늘은 고난주간이다.
예수님의 고난을 다시 새기기 위해서 지내지만 유럽에서는 여러가지 행사가 많다. 하면서도 그 고난에 대한 깊은 의미를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금 배운다. 마태복음 7:22~23에서 내가 주님을 위해 충성했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라 책망하신다. 남들이 못하고 안하는 일을 하고도 사람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며 욕먹는 사람이 있다. 겸손이 없어서이다.
도날드 고액츠 박사가 미국 크리스쳔 잡지에 교만과 겸손을 기고했다.
교만한 사람일수록 겸손, 복종을 요구한다. 자기가 교만한 줄 모른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교만한 사람이라 늘 자기를 쳐서 복종케 한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 바울이다.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욕망에 이끌려 겸손하지못했기에 뉘우친다. 집에 있는 밥그릇 국그릇 반찬 그릇이 쓰여지지만 쓰인 후에는 말끔히 깨끗이 닦아야 다음에 또 쓸 수 있다. 흔적이 남아있으면 다시 사용하지 못한다. 늘 낮추고 회개하고 겸손해야 한다. 진리를 빙자해서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이단이 있다. 귀한 것일수록 시험이 있다. 겸손조차도 겸손을 빙자해서 유혹하는 이단이 있다.
공산주의가 모두 평등하다고 한다. 그 이론에 빠져서 패가망신한 이가 많다. 이단이 우리 앞에 와서 겸손한 척 하는 것을 본다. 신령과 진정으로 겸손해야 한다.
고난주간에 고난만 생각한다. 그런데 겸손이 없으면 사랑을 주면서도 사랑의 명분으로 상대방을 괴롭힌다.
스토커이다. 불같은 사랑이지만 자제시키고 겸손해야 하지만 사랑 타령만 하지 진정한 사랑의 감동을 주지 못한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아버지 마음을 심리학자들이 연구한다.
아버지는 그렇게 무능해 보일 수 없다. 유산 달라는 자식이 아닌 줄 알면 교육시켜야 하는데 내보낸다. 탕진한 자식을 야단쳐야 하는데 끌어안는 아버지는 바보이다. 아버지의 무지와 무식이 그대로 생활 가운데 나타난다. 그러나 실지 무능하고 바보라서가 아니라 깊은 속에 덕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가슴속에 무궁무진하게 감추어진 것이 사랑이고 그 사랑이 능력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병자를 고치시고 풍랑도 잔잔케 하셨지만 그 능력은 사랑의 능력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 오늘 본문 말씀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추리한다.
많은 유대인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찾는데 최소한 유월절에 가시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다.
또한, 예루살렘 입성에 조용히 하셨어야 했다.
빌라도가 말릴 때 그 말만 들으셨어도 빌라도가 피신시켰을 것이다.
공회원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중에서도 예수님과 교류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말만 들었어도 피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깨끗케 하는 일만 하지 않으셨어도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같지 아니하고 권세있는 분과 같았다고 성경에서 표현한다.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은 선지자 엘리야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던 분이 보좌를 비우시고 이 땅에 오신 분, 즉 창조주의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 표현한다. 그러한 분이 이 땅에 오셨으니 왕인들 뭐라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예수님의 겸손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투덜대고 원망하는 것은 겸손치 못함이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 빌립보서 2장에서 말씀한다.
예수님 당시에 충성을 다한 나사로 마르다 삭개오, 마태, 성경에 기록된 이들이 많다. 그런데 예수님 마지막에 그들 이름이 없고 무명의 제자가 있다. 교회 일꾼 세울 때 겸손한 예식이 필요하지만 교회를 들썩이게 하는 것이 문제이다. 돈이 없어서 나귀를 타신 것이 아니다. 천군천사를 불러서 십자가에 못박으러 오는 사람들을 물리칠 수 있지만 겸손하게 수행하신다.
겸손해야 하는 이유이다. 몸에 익혀야 한다. 교회가 성장하기 까지 이름없는 분들, 예수님께 사용하시라 나귀를 내어준 이름없는 제자들, 쓰여지면서도 이름없는 사람들, 큰 사람은 자기를 숨길 줄 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 때 목사가 서툴러 모두에게 알리지 못하고 진행할 때도 있다. 그런데 왜 나를 빼고 하느냐 항의하는 분도 있다. 예수님은 허락을 맡으라가 아니라 나귀를 가져오라 하신다. 그 주인은 자기와 의논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요구한 것을 그대로 순종한다. 사람이 모든 것을 의논하며 진행해야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럴 수가 없다.
겸손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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