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에
200419 박재덕목사
(사도행전 15:1~5)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교회에 보고하고 오래 머물러 있는다.
그런데 본의아니게 본문의 내용처럼 예루살렘교회에 가게 된다. 다툼과 변론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파견된 안디옥교회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유대인들이 와 보았을 때에는 이방인들이 이곳에 와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하여 많이 놀란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이들에게 율법의 할례를 요구한 것이다. 수많은 대다수의 이방인들이 할례받지 않았으므로 바울과 바나바는 할례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아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로 보낸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초창기에도 주일날 돈 쓰지 말라고 토요일밤에 교회로 와서 월요일이 되어 귀가하는 교인도 있었다. 버스를 타지말라는 것도 주일에는 돈쓰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기 위함이었다.(註 : 돈쓰지 말라는 것은 상대가 거룩히 지켜야 할 주일을 범하여 일하게 하기 때문임)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에 왔더니 바리새파 사람들이 당연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바리새파란 분리된 자라는 뜻이다. 평범한 삶에서 경건을 강조하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산헤들린 공회 회원들이었고 율법주의자들이었다. 예루살렘교회에서도 논쟁이 일어난다. 이에 베드로가 말한다. 이것은 멍에다. 할례는 멍에라는 것이다. 십자가로 이미 충분하다고 말한다. 왜 온전히 지키기 힘든 멍에를 매려느냐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베드로에게는 고넬료 사건이 있었다. 부정한 음식에 대한 환상의 사건이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을 연 첫 선교자이다. 바울과 바나바도 이에 수긍한다.
야고보가 일어난다.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이 일치한다고 말한다. 이방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칭호가 예정된 것이라.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자고 결론낸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된 이방인들에게 또다른 새로운 조건을 요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서 조건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허물로 죽은 우리를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조건이 없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으로 충분하지만 이방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앞으로의 행위 즉 그리스도인되는 조건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별된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로마서 14장에서 믿음이 약한 자에 대하여 말한다.
고대사에는 국가와 종교가 항상 붙어있었다. 신이 나에게 권위 즉 왕의 권위를 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에게 제사한 후에야 고기가 시중에 유통된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사자굴에 들어가면서까지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은 우상에게 제사지낸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에 와서는 황제가 스스로 신이 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 즉 허구에 바친 것이니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먹어도 된다고 한 것이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연약한 자들, 믿음이 약한 자들이 우상 제물을 먹지 않겠다는 것을 지적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받으라 그리고 그들에게 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에 대한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조심하라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살라는 의미이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하는 구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된 자로서 세상과 구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로서 한 사람도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스스로 자랑할 것이 없다. 결국 우상 제물을 먹고 안먹고 할례를 받고 안받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가 차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건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즉 구원받은 사람에게 멍에를 씌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우리가 사나 죽으나 다 주의 것이니 내 정체성은 내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대지만 상대에게는 잣대를 댈 수 없는 것이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 때문이다. 그가 나로 인하여 상처를 받을까 염려함 때문이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이다. 야고보는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별된 삶을 말한다.
결국 우리의 일상에서 그리스도인의 구별된 정체성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구별된 삶, 성화해 가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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