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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조원형목사님

200906 조상의 신앙

조상의 신앙

 

200906                               조원형목사님

 

(로마서 4:18~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창세기 47장에서 야곱이 바로왕앞에 서게 된다. 자기의 나이를 묻는 바로왕에게 말한다.

내 나그네길이 130년이지만 내 조상의 나그네 길에 미치지 못하지만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한다. 금년 올해를 살면서 한국 교회 성도들의 고백이 험악한 세월을 살고 있다는 고백으로 들린다. 사는 것도 힘든거지만 성도들의 중요한 예배의 은총을 누리지 못한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아니고 전염병때문에 교회 문을 닫고 낙심지경에 이른다. 발동기가 고장난 작은 배가 바다에서 표류하듯 안타깝고 가슴치고 통곡하는 시대를 산다. 이곳 복지원에서 내 자신은 이제 일년가까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을 가지고 살지만 성도들은 생활, 경제, 정치문제로 탈진하다시피하는 세월을 보낸다. 하면서도 성도들을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뒤늦게나마 깨닫는다.

 

코로나19가 맨처음 조금씩 시작하더니 이제는 몇달 안되어 전국적으로 퍼지며 탈진하는 시대가 되었다.

도시 생활하며 고난을 겪는데 시골의 나는 편안할 줄 알았지만 올해 장마조차도 가장 오랜 장마를 겪으며 해충도 그렇게 많이 보게 될 줄 몰랐다. 교회 예배당 안에까지 침범하여 청소하고 청소해도 잠시 자리를 비우면 또다시 노리개라는 벌레가 들어온다. 중공군 인해전술로 느껴진다. 바가지로 한바가지씩 쏟아내며 매일같이 보낸다. 해충제를 뿌려도 여전하다. 해충과의 싸움이다. 안죽을 줄 알았더니 어느새 가을이 오며 노리개가 없어진다. 이제는 노래하는 귀뚜라미 시절이 왔다. 이것을 보며 세상 이치를 깨닫는다. 추운 시베리아 땅에서도 따스한 햇빛이 비추고 태양열을 느낀다. 더위가 물러가지 않을 듯 하지만 장마가 오고 또 장마가 끝나고 선선한 바람이 분다. 세상 이치를 본다. 권력이 일시적이고 세상 이치가 잠시잠깐인 것을 보며 이 고통이 잠시잠깐인 줄 알면서도 분노하고 참지 못하며 오늘을 살아가는걸 보며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톨스토이가 쓴 책에서 사람들이 희망에 속기보다는 절망에 속고 산다고 말한다.

당시 사람들이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오늘만을 보며 그 시기만을 보고 절망속에서 사는걸 보며 그런 글을 쓰지 않았나 생각한다. 오늘의 한국교회도 겸손, 인내, 낮아짐보다는 분노로 인해 자신의 신앙과 교회의 신앙을 망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며 성경을 보면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메시야의 이야기를 보며, 아벨과 므두셀라, 다윗,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훌륭해서 우러러보는 것이 많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믿음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나를 본다. 낙심하지 않고 나를 선택하고 나를 양육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발견한다. 이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기도하는 사명을 다하고 내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도 바울도 우리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하며 우리도 미천한 것 같지만 우리를 일으키신다고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다. 판단이 서질 않고 낙심지경에 이른 성도들에게 빛이 되고 치료의 말씀이 되고 은총의 말씀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다.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혼란에 빠져 주일 예배도 인터넷 예배, 영상 예배로 보지만 교회도 양분화하여 거리 유지를 하며 교회 마당에 앉아서라도 가능할텐데 성도들 신앙이 죽어가는데도 법을 지킨다는 원리로 무대면으로, 아니면 그 반대로 법을 어기며 반항하는 교회로 분노의 깃발을 내걸며 스스로 용사라고 생각하는 이 시대가 되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렇게 줄기차게 쏟아지던 장마와 한여름의 무더위조차도 어느듯 이제는 두터운 이불을 덮어야 하는 시절이 되었다. 오직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몇천년의 역사를 지내오며 그 역사는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깨닫는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중심으로 다시 일어서는 신앙을 가질 때이다.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학자라고 하는 포스폴츠라는 분이 "사람에게는 아이큐가 있다, 감성지수가 지능지수를 능가한다. 이제는 AQ즉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이 성공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경지수를 높여주시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한다. 처음엔 아브라함도 믿음이 약하였지만 나중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만큼 자식을 바칠 만큼 이르게 하신 그 과정을 지켜보면 나같이 미천한 사람도 하나님의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심을 기다리게 된다.

 

포스폴츠 교수는 세가지 사람을 말한다.

먼저, 위기를 포기하는 사람이다. 이 위기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말한다. 일찌감치 포기한다.

둘째, 누가 도와주지 않나 기다리는 사람이다.

세째는, 도전하는 사람이다. 싸워서 이기고자 책임을 다하고 노력한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도 이 세가지 약점을 다 가졌다. 가슴이 덜컹하고 낙심하지만 기도하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서서히 일어선다. 누가 도와주지 않나 기다려도 보지만 결국엔 스스로 어려움에 대처하며 살아가게 된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에게 은혜 베푸신 것을 사도 바울은 돌아본다.

개혁 신앙, 칼뱅 신앙의 기초로 해석한다. 창세기15:6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말씀한다. 하나님이 뭘 보고 의로 여기셨나. 너가 나를 믿으니 의롭다고 쉽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주신 믿음의 씨앗이다. 성도들에게서도 믿음을 고백후에 믿음이 자라나감을 본다. 그 믿음은 생명력이 있는 믿음이다. 부흥회 안수기도받아서 받는게 아니다. 내 속에 들어와서 역사하실 때 생기는 신앙의 믿음이다. 성령께서 주시지 않으면 지켜질 수도 없고 자랄 수도 없다. 결국은 성령깨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생명력있는 믿음의 씨앗을 주신 것이다. 하박국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처럼 농부가 밭에 뿌린 씨앗이 자라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믿는 신앙이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부모를 믿는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아비 친척을 버리고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하실 때 목적지를 정한 것은 아니다. 신앙 생활에서 어떤 결과를 주실지는 몰라도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행동하는 신앙이다. 신앙에 생명력있는 믿음을 보이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그리고 가슴에도 생명력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행동력없는 사람도 많다. 가뭄에 시들시들해질 때조차도 아브라함의 아내를 이방의 왕 앞에서 누이라고 할 때에도 하나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약속의 땅으로 가게 하신다. 그 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책망치 않으셨다. 모두 다 수습해 놓으시고 다시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그리하면서 아브라함의 신앙이 업그레이드된다. 자신의 아내가 나이들어 후대를 잇게 하려고 인간적 방법으로 사라의 몸종 하갈을 쓴다.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도 늙고 사라도 늙어 그 약속의 말씀에 웃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심을 보며 결국엔 모리아산에 아들이 바치는 믿음에까지 자라나게 된다. 결국엔 부활의 신앙에까지 이른다.

 

지금 세상의 혼란에 믿음의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능치못할 일이 없으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우리가 마지막 겪는 죽음의 단계인 요단강을 건널 때 죽음의 단계조차도 믿음의  사람으로 극복하게 하신다. 험악한 세월을 살지만 야곱이 야곱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사기꾼같은, 얄미운  요셉이지만 하나님이 자랑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분노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며 내적으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말씀을 들으며 낮고 낮은 자리에서 소망을 가지고 신앙의 본분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전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오늘을 살자.

 

 

우리를 주의 자녀로 선택하시고 아브라함을 키워 양육하셔서 믿음의 조상다운 사람되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가르치시고 훈계하시고 험악한 세월도 살게 하시지만 때를 따라 회복케 하시고 다시 일으켜주시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시는 우리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오늘 고난중에 시련중에 세상에 휘들려서 그 귀한 믿음 상실한 사람들 다 회복의 은혜를 더하시고 일으켜주시고 주님을 우러러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회복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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