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이 썩은 후에
200920 조원형목사님
(욥기 19:23~29)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개혁성경에서 26절 말씀은 너무 차이가 난다.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구약성경 느헤미야서에 나오는 느헤미야를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닫고 회개하게 된다. 느헤미야가 포로가 잡혀가 있으면서도 예루살렘 소식을 늘 귀담아 듣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기도했는데 성전이 허물어지고 위대하다고 자랑하던 솔로몬 성전이 허물어지고 성도들이 그 성전을 떠나고... 이런 소식을 듣자 금식하고 옷을 찢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끝내는 왕의 허락을 받아서 스룹바벨 성전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그 성전, 그 성전을 재건하게 된다.
한국교회가 겉으로 보기에는 잘 지었다고 자랑하는 교회, 광고하는 교회, 으시대는 교회가 많았지만 결국 상상도 못했던 교회문을 두주간이나 닫아야 하는 참상을 겪는다.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 성도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여러가지 이유로 예배를 드린다고는 하지만 성전 섬기는 일을 등한시한다.
지난 날 수해에 헌금했고 재난에 지원했던 것처럼 성전재난헌금을 이제 어려움에 닥친 교회에 대하여 형편껏, 그 동안 교회를 멀리 했고 가까이서 섬기지 못했던 마음을 하나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되지 않겠나 생각도 한다. 그래야만 교회를 위해 섬기는 분들, 봉사하고 헌신하는 분들에게 생활비도 지급하고 교회도 활발히 움직여서 교회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유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느헤미야서를 다시한번 깊히 생각해보면서, 한국교회의 재난의 때를 돌이켜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이 핑게 저 핑게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의 교회를 멀리했고 그 동안 섬기지 못한 죄가 얼마나 큰가를 금식도 하면서 회개하는 기간을 가졌으면 한다.
이곳 수양관에서 이어지는 연암산 길이 소방도로로 한서대학까지 7Km가 조금 넘는 거리를 가끔 걷는다.
그런데 길에서 뱀을 만났다. 예전같으면 들고있던 지팡이로 내리쳤을텐데 나이가 들고 신앙의 훈련을 받아온 사람으로서 언뜻 성경말씀이 생각났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두셨느니라.(잠언 16:4) 이 다음에 뱀이 커서 언제 누구를 어떻게 해할지는 몰라도 그냥 내버려두는게 하나님의 뜻이겠거니 생각하고 그냥 지나쳐간 적이 있다. 그러면서 왜 하필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중에 뱀이 간교하니라는 말씀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을까,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았다. 신학이나 교리적이 아니라 짧은 생각으로 생각해본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아담을 세우시고 다스리는 자로, 통치자로 세우셨다. 그런데 다스리는 자, 통치자가 하루아침에 되어지는 건 아니라는걸 경험상 잘 안다. 많은 연단 과정을 통해서 자기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알고 남을 다스리고 세상을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덴 동산이지만 시험도 있고 시련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서 더욱 하나님 말씀이 귀하다는걸 깨닫고 하나님 말씀에 굳건히 서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진데 하나님이 아담을 큰 사람으로, 다스리는 자로 세우시려고 그런 짐승도 지어놓지 않으셨을까, 둘째 아담 예수님은 모든 시험이 있었지만 그 시험을 끝내는 다 물리치시고 극복하시고 이겨내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걸 생각해보면 아담에게도 많은 연단이 필요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오늘 많은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되는구나, 그리하여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는구나, 이 과정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방법이구나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조 앤 롤링이라는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20대 초반에 영국에서 포르투칼로 가서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다. 그 결혼 생활이 평탄치가 않다. 2년만에 딸 하나 얻고 이혼한다. 그리고 영국에 무일푼으로 돌아오는데 가난에 찌들어 근근히 싱글맘의 인생을 산다. 어린 딸과 함께 죽어버릴까 생각도 했다.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딸에게 동화책이라도 사서 읽어주어야겠는데 살 돈도 없다. 그리하여 어린 딸을 위해서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쓴 동화 헤리포터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로 만들어지고 엄청난 부를 축척하며 세계적인 50대 부호에 들어간다. 그는 말한다. '나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습니다. 내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딸이 있습니다. ...내게 있는 딸에게 들려주어야 할 동화를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게 되어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전기를 들으며 고난의 때는 있지만 낙심하고 그냥 세속적인 삶보다는 고난의 때에 깨어서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고, 고통중에서도 인생을 이대로 마감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일어서게 된다. 그리하여 성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고난의 때에 낙심하고 절망했던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살면서 인생 재건에 성공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 욥기서를 보면서 이 세상을 살며 고난을 이기고 고난을 극복한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세속적인 축복이 다 일까 깊히 생각해 본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중년들어 잘 되기 시작하여 끝내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가끔 듣는다. 내 자신은 어릴 적 생각하고 시도하고 했던 일들이 되질 않아서 나는 안되는 인생을 사는가보다 했는데 목회하면서 어느 날부터 되기 시작한다. 그리하면서 목회를 마칠 수가 있었는데 이제와서 그것이 전부 다가 아니다. 그 후의 얘기가 있다.
그걸 오늘 성경 본문에서 보고자 한다.
욥이 어려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런데 복을 받아서 10자녀를 두었고 엄청난 수의 짐승을 거느렸고 종들을 거느렸고 동방의 의인이란 칭호까지 얻었고 엄청난 부를 축척했는데 그게 문제이다. 부만 축척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도 얻지 못했다면 부자로서의 가치가 없다.
예수믿는 사람 신앙이 고생고생하고 십일조하고 성수주일하고 그러다가보니 내 때엔 안됐어도 자식 때가 잘되었다 그 이야기가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에겐 이 생이 전부가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가 이미 세상에서 잘되는게 최고의 복으로 알지만 성경을 통해보면 그 얘기가 아니다. 욥기서를 통해 보면 그게 아니다.
유대인의 신앙을 돌아가서 본다.
메시야도 오셨는데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바로 알지 못해서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그 자손들이 세계에 흩어지는 고통을 오래동안 겪은 민족이긴 하지만 그들에게서 배우는 교훈이 있다.
그들이 겪는 고난을 통해서도 낙심하지 않는 신앙을 배운다. 고난중에도 찬송을 부른다. 고난중에 믿음이 더 충천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어야만 받아들이는 습관이 어느 때부터인가 있는데 어렸을 땐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이 중고등학교의 세속적 지식이 들어오면서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고난 중에서 이런 고백을 한다.
'이성으로 이해가 안되기에 나는 믿는다' 그걸 훈련을 받는다. 믿고나니까 하나님 말씀이 옳았구나 그런 훈련을 받는다. 그래서 '아니 마밈'이라는 노래를 유대인들이 아우츠비츠 수용소에서 불렀는데 "나는 믿습니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해 반드시 오시리라는 것을...그런데 메시야가 더디 오십니다." 그런 히브리어 노래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예수믿으면서 지도자들이 깨이질 못해서 예수 잘 믿어서 축복받는게 전부인 것처럼 강조했기에 예배시간에 기도드리는 내용이 전부 다 잘 살게 해주십사 건강하게 해 주십사 형통하게 해 주십사 이 기도 이상을 못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고난의 노래로 훈련을 받는다. 그리하여 신앙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킨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원하셨던 깊은 뜻이 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공경해서 욥이 잘 살게 되었고 명성도 얻었고 존경도 받고 그게 다인 것처럼 인생을 살뻔 했는데 하나님은 욥에게 내세의 세계를 가르쳐주셔야겠다 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단에게 시험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우리 머리카락 하나도 발끝 하나도 사탄이 시험을 못한다.그런데 하나님이 때로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른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서 광야로 내모실 때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바다 끝으로 이끄신 분도 여호와이시고 먹을것이 없어서 원망했던 그 때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리신 분도 여호와시고 이런 과정을 보면 욥에게도 연단의 과정이 남아있음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하여 욥에게 허락하셨던 것을 거두어가신다.
재산을 거두시고 자식을 거두시고 건강을 거두신다. 그러니 욥이 크게 낙심하고 절망한다. 하나님 앞에 큰 죄 지은게 없는데 하나님이 왜 이러실까. 죄를 지어야만 시험을 겪고 시련을 겪고 아픔을 겪고 실패하고 고통을 겪는줄로 생각하지만
아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이끄시는 사람은 나도 모르는 곳으로 이끌려간다. 내 삶이 내 생애가 고달프고 낙심지경에 이를 때 거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게 되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바로 서려고 애를 쓴다.
위로자도 없어졌다. 가족중 아내조차 당신 꼴을 보니 하나님 공경해서 복받고 잘 산다더니 그게 뭔 모양이냐 하나님 악담하고 죽어라 하고 가버린다. 거기에 친구들이 왔는데 하는 말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은 이 땅에서 늦은 복이라도 받는다면서 욥의 고난을 보고 충고라는게 오히려 번거로움만 끼친다.
이에 욥이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한다. 내 고난의 이유라도, 털끝만한 죄라도 생각나면 회개하겠는데 내 나름대로는 바르게 살았다 하면서 친구들 위로조차 거절한다.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많은 위로를 한다지만 그 사정을 누가 알겠는가 하나님 외에는...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거지 나사로가 생각난다. 거지 나사로가 태어날 때부터 거지였을까. 욥기서를 보면 아닐 수도 있다. 부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살았을지 모른다. 사회적 위치도 있었을거다. 그런데 왜 거지 나사로이고 헌데를 앓으면서 살게 하셨을까. 이 생뿐이라면 나사로에게 행하신 하나님이 잘못하신거다. 그러나 이 세상은 성경 곳곳에서 심판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사람은 죽음으로 끝나고 그 이상의 세계에 계신 하나님,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이 임시방편으로 가죽옷을 지어입히셨지만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부활의 옷으로 갈아입히시기 위한 예비를 해놓으신 것으로 본문에서 욥이 깨닫는다.
스데반 집사가 초대교회때에 제일 먼저 돌에 맞아 죽는다.
그 의미가 참 크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하늘을 우러러 예수님이 보좌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말한다.그 광경 그 고백을 가까이서 들었던 사도들이 예수님만 하늘로 승천하신 것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도 하늘나라로 승천하도록 준비해 놓으셨구나 깨닫고 죽더라도 순교의 제물이 되더라도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전도하며 충성한다. 스데반 집사 하나를 죽음으로 한 이유이다.
욥기서를 보며 칭찬도 주시지만 징계도 하시는 부모님처럼 그 의미를 깨닫는다.
그가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같은 신앙으로 나온다는걸 깨닫는다. 욥42:5에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만 들었사온데 눈으로 본다고 고백한다.
욥19:26에서 새번역 성경에서 "내가 가죽이 벗김을 당한 후"보다는 개혁성경 "내 가죽이 썩은 후" 육체 밖에서 주님을 보리라는 신앙을 체험한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예수 잘 믿어서 복 받고 평안하고 영광 누리고 교회 잘 짓고 세계적인 선교를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이 하고 자랑할게 아니다. 쓰여질 수 있었으니 감사하고 이것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내세에 예비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잊어버리고 있다.
오늘 우리가 욥을 통해서 배우는 교훈은 이 세상도 종말이 온다. 이단이 말하는 의미가 아니다.
인생도,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죽음은 온다. 내세를 준비해야 할 이유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희 거할 곳을 예비하러 가노라 말씀하셨다.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이 세상에서 나이들고 늙어서 편안하고 잠자다가 가는 것이 우리 욕심이지만 어떻게 죽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가죽 이 몸이 썩은 후에 육체 밖에서 내가 하나님을 본다는 믿음으로 깨어서 하나님 공경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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