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
201004 조원형목사님
(마태복음 16:13~2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를 믿으려 결심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성령께서 임재하심을 느낀다.
성수주일과 십일조를 하면서 늘 하나님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이었지만 외적으로는 가족 친척으로부터 많은 핍박도 받았다. 신앙생활한지 한달도 안되어 이유 모르는 병에 들어 식음을 전폐했다. 집에서 섬기는 조상과 우상을 멀리하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니 그런게 아니냐 하는 외할머니의 권면도 있었다. 죽음에까지 이를 지경이었는데 사나흘 후에 입술로부터 물방울이 떨어지고 생기가 돌아 눈을 뜨고 보니 십자가의 예수님의 피가 떨어져 생기가 돋는 것을 본다.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려보니 비몽사몽간이었던걸 기억한다.
신앙생활한지 얼마안된 나에게 왜 이런 시련, 경험을 주셨을까.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이유와 처지가 모두 다르다. 하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면서도 예수를 믿고 은총을 알게 된 것은 예수님의 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더 확신하며 살아오게 되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은 은총이라 생각한다.
얼마후에 꿈을 꾸는데 저편에서 희끗한 옷을 입은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너를 구원한 예수다 한다.
그런데 예수님 비슷하긴 한데 다가오는 형체가 이상해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라면 손바닥의 못 자욱을 보여 달라하니 점점 검은 옷으로 변하기에 사탄아 물러가라 하니 사라진다. 당시 이단도 있고 통일교가 전국적으로 전도의 열을 다했고 여호와의 증인이 있었고 교회가 성장하는 만큼 기승을 부렸다. 성령께서 분별력을 주심도 느낀다.
얼마후 또 꿈에서 산비탈의 큰 양목장이 있는데 양들이 풀을 뜯는다.
어디선가 이리다 소리치며 이리 한마리가 나타나 소란을 피우는데 어리둥절하고 방황하는데 하늘에서 도망하는 목자부터 붙들라 한다. 그리고 꿈에서 깬다. 그 당시 시골엔 목회자가 드물었다. 그리하여 떠나려던 시골에서 계속 목회를 계속한다. 그 후에 다시 당시의 외진 곳 부천에서 목회해온 기억이 난다.
오늘이 우리 교회 설립 44주년이며 은퇴하고 초록리에서 1주년된 주일이다.
지난 시간 동안 몹쓸 나를 낙심하고 쓰러지고 넘어졌던 일이 생각나서 회개하는 시간을 가지며 쓰임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축하 전화도 받고 44주년된 은혜로 메세지도 많이 받았다. 감사하다. 지금도 이곳에서 쉬지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은혜에 감사 감격하기도 한다. 가족과 유튜브를 통해서 메세지를 전하며 또 기회가 되시면 들어주시길 바란다.
교회의 기본이 뭔가. 성도의 기본 신앙이 무엇인가.
집을 지을 때 기초는 무엇인가. 반석위의 집과 모래위의 집이란 비유도 있지만 반석위에 세워진 신앙,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롤로메이 교수가 '존재의 단위'에서 사람의 형태를 세가지로 나눈다.
첫째, 생계에 걸린 신앙, 환경에 의해 육신의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생계와 환경의 지배 속에서 살다가 마는 사람이 있다.
짐승도 먹이를 얻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니까 수입을 통해서 의식주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매여서 사는 사람들이다. 의식주가 해결되면 거기에 만족하고 거기에 안주하며 사는 사람이다.
둘째는, 사회에 마음을 쏟고 사는 사람이다. 정치적 사회적 동물로서 좀더 삶에 형제와 모임과 사회에 적응하고 사는 사람이다. 거기에서 행복을 얻는다. 그걸로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다. 명예 명분 혈육 교제 등이 중요하다. 생계 문제에서 좀더 성숙하긴 하다.
세째는, 좀더 사회적, 공동체, 조직의 문제만이 아니라 소유, 소속, 실존의 문제뿐이 아니라 자신의 성찰, 종교의 문제, 영혼의 문제를 말한다.
하우스 푸어란 말이 있었다.
거기에 융자하고 빚을 내어 투자하고 모든걸 쏟아부었는데 그게 모두 헛소문이다. 융자에 대해 이자를 갚는데도 집값이 내려간다. 거지와 다를 바 없다. 실지 거지는 빚은 없지만 이들은 빚진 거지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거기서 인생을 끝내고 만다. 그게 궁극적, 영혼의 문제요 사람들의 숙제이다.
중세의 철학자는 사색을 많이 했다.
자신에 대하여 인생에 대하여 많이 걸었는데 앞을 못보고 부딪힌다. 당신이 누구요 하니 글쎄 그게 고민이라 대답한다. 현대인들은 뜬구름을 쫒는다. 하지만 거기서 공허함은 더욱 큼을 느낀다.
유명한 이가 궁중들로부터 박수를 받지만 그 무대에서 내려와 집에 들어가면 우주에서 버려진 듯한 공허함을 느낀다.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에서는 내가 당신을 알기까지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고백한다. 부유한 곳에서 태어나서 실존의 문제를 풀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안 후 이것이 가장 큰 은총이었음을 고백한다.
칼뱅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신에 대한 지식은 없다고 말한다.
그 다음엔 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다고 말한다. 피조물인데 타락한 피조물이라 한다.
요즈음 진인(塵人)이란 이름이 나온다.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다보니 먼지를 보며 자신이 먼지같은 존재란 말을 한다. 창세기에서 너는 흙이라 하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먼지란 의미이다. 너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나 자신이 흙이고 먼지인 것임을 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사람마다 자기의 지식 상식 경험으로 보기는 하지만 빛이 없으면 보지를 못한다.
요즈음 정치인들은 소경보다도 못한 깜깜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교만한 말을 한다. 짧은 지식을 가지고 명분을 대며 겸손치가 못하다. 영적인 빛이 없기에 세속적인 말을 해도 바르게 하질 못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만 있는데서 말씀한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신다.
세례요한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예레미야라 선지자라 한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신다.
교회 지도자, 중직, 교인, 성도들에게 묻는다.
선한 목자, 어린 양....틀린 말은 아니지만 핵심적인 말은 못한다. 본문에서 시몬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대답한다. 당시 베드로의 실력, 경험, 지식으로는 선생님 즉 랍비여 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런데 주(主) 즉 나를 피로 값주시고 사신 주를 말한다. 사람이 죽고 흙으로 돌아간다. 영면한다는 것이 그걸로 끝난게 아니라 심판이 있다. 성경에서는 멸망이라 한다. 지옥이라고도 부른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주는 나를 피로 값주시고 사신 주이다.
존 뉴턴 목사님 이야기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냥하여 군대를 이끌고 동네를 공격하여 젊은 여인 남자를 끌어다가 돈받고 판다. 자식을 낳아도 주인의 자산에 불과하다.
예수님 당시에도 노예도 많았다. 그런데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평시 부르던 랍비 즉 선생님이 아니라, 주 즉 심판받을 나를 피로 죄값을 주고 사신 주를 고백한다. 이성으로 깨닫는 주가 아니라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주이시다. 심판에서 구원하신 주이다. 이 고백이 없으면 모래위의 집이요 모래위의 교회이다. 사람의 권력을 행사하는 장소로,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장소로 둔갑하여 교만해지고 물의를 일으킨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겸손함 가운데서 나의 죄를 주의 피로 사주셔서 구원에 이르는 축복의 은혜로 감사감격하여 찬양하는 은혜와 은총이 넘치는 교회와 성도되기를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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