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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조원형목사님

11030 피조물의 소망

피조물의 소망

 

11030                                                                                                                  조원형목사님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로마서 8:18~21)

 

지난 주에 작가 박완서씨의 죽음으로 말이 많았다.

그가 쓴 글들 중에서 인생의 일을 글로 잘 표현한 제목이 있다. "사막은 가시나무라도 사랑해야 살아남는다."이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를 사랑해야 나라는 존재도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그러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이다. 생활의 고통, 아픔을 드라마처럼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사소한 일에서 시작한 갈등이 삶을 망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영화의 내용처럼 죽을 고비를 수없이 겪지만 결국은 정의가 승리하는 것과 같다.

 

1년중에 고난주간을 의미있게 보낸다. 우리 주님이 우리대신 고난당하시고 제물이 되신 기간이기 때문이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짐으로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부활로 이어져  영광에 참여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고난에 대하여 기억하며 지킨다. 유대인의 유월절 기념이 대표적이다. 출애굽한 축제절기일텐데도 고난주간을 그 때에 지킨다.

과거의 고난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과거의 고난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누룩없는 떡과 쓴나물을 먹으며 금식도 한다. 절박한 상황에서 기도하기 위해서, 하나님 의지하는 믿음이 진실해진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생애는 고난의 연속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부활의 아침 전까지는 고난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

 

유대인의 유월절 찬양을 아니마임이라 한다. "나는 믿는다"는 찬양이다.  아우슈비츠 감옥에서 가스실에 들어가면서도 부른 찬양이다.

1절에서 "나는 믿는다. 나는 믿는다. 내 메시야가 오셔서 나를 도우시리라고 나는 믿는다"는 가사이다. 절박한 심정을 노래한다.

그러나 2절에서는 "기다리고 기다려도 기도하고 기도해도 메시야는 아직 오시지 않는다."는 가사로 이어진다. 절망과 절규의 노래이다. 탄식과 불만, 원망의 노래이다.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수감된 한 외과의사가 노동을 하다가 깨진 유리조각을 발견하고 자기 수염을 면도하게 된다. 자신을 단정하게 한다. 절망속에서도 단정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세로 산다.

독일군이 유대인을 다 죽여도 이 사람만큼은 정신이 살아있는 것 같아보이는지.. 살려둔다.

이 사람이 세상에 나와서 글을 쓴다. 그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것은 찬양때문이라 말한다. 2절을 바꿔불렀다.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서둘러서 사람들은 믿음을 포기한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탄식, 절규의 노래를 희망의 노래로 바꾼다.

 

나는 믿는다. 내 꿈을 이루어주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세로 살자.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다리며 살자.

 

오늘의 본문이 그러하다.

하나님앞에 지혜와 긍휼과 자비를 구한다.

화장장에 가면 관들이 순서를 기다린다. 문이 열리고 화장로속으로 들어간다. 두번째 관을 넣으려니까 관속에서 소리가 난다. 그래서 꺼내보니 살아있었다. 그러한 꿈을 꾼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끝이 없다. 절망이 없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리라. 내 꿈을 이루어주시리라.

 

피조물은 알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심판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은 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있음을 안다. 생명있는 씨와 생명이 없는 씨도 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타락하여 그것을 모른다. 자연이 오히려 우리 인간을 보고 탄식한다.

발람은 당대의 선지자이다. 그러나 타고 다니던 나귀가 발람을 보고 제 죽는 줄 모른다고 탄식한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말씀한다.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믿는 자는 같이 죽어도 그 속에 부활의 생명이 있다. 죽은 것 같은 씨속에 생명이 있는 것과 같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존재감은 세상이 모르는 생명에 있다.

 

농촌 시골의 봄에 가보면 냄새가 지독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생명이 움튼다.

이 믿음은 자라난다. 죽음과 절망속에서도 다시 살아난다. 핍박하고 목을 자르면서도 그 자신은 모르지만 자연(自然)은 안다.

 

사탄이 욥을 시험한다.

하지만 결국 사탄은 욥을 오히려 무서워한다. 그리하여 떠나간다.

스데반이 죽음속에서도 얼굴에 광채가 난다. 사도바울 이전의 사울이 그것을 본다.

 

신학자 오스카 쿨만은 이미 영광의 구원은 얻은 것이라 말한다.

칼뱅은 구원은 법정적 선포라고 말한다. 판결은 끝났고 이제는 실천 과정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피조물이 탄식하는 보잘 것 없는 종교인이 아니라 세상을 불쌍히, 긍휼히 여기는 신앙인으로 살아야 한다.

생명의 능력이 믿음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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