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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조원형목사님

131027 내 멍에를 배우라

멍에를 배우라

131027                                                                                                조원형목사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5~30)

 

옛날 고대 중국의 황제 고조는 때를 정하여 정사를 의논했다.

대부분 다른 이들은 아부하고 동조하는데 신하 육생이 충언한다. 그것이 못마땅한 고조가 말한다. 나는 말을 타고 천하를 얻었다 하니 육생이 말을 타고는 세상을 다스릴 수 없다고 대답한다. 여러 나라가 강한 칼과 형벌로 세상을 다스렸지만 망했고, 인과 예로 통일할 수 있었다고 충언한다. 나라 성패에 대한 글을 올리라 하여 그 글로 고조가 통치하니 400여년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다.

사람은 고정관념에 매여  산다.

그 삶을 돌이키고 더 낫고 선한 방법으로 바꾸기가 힘들다. 말씀을 통하여 마음에 새기고 마음의 지표를 수정해 보자.

 

장로교에서는 칼빈을 신봉한다.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이고, 성 어거스틴의 신학은 3가지를 말한다. 먼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시고 진실하심을 믿는다. 인격의 하나님이시요 세상을 창조, 통치하시고 세상 끝날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믿는다. 둘째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믿는다. 말씀, 역사, 섭리하심을 믿는다. 셋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만세전부터 지금까지도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존재함을, 후에 늙고 노쇠하고 세상을 떠나고 영원한 유업을 주심을 믿는다.

믿긴 믿어도 뭘 알아야 믿는 것이 아닌가 고민할 때 이단과 이종 종파가 파고든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알기 이전이다.

하나님을 믿기에 알게 되는 것이지 알고나서 믿는 것이 아니다. 에덴 동산에서 마귀의 꾐에 빠진 경우가 그러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진실하심, 능하심, 사랑을 믿는다.

피조물이 어찌 창조주를 알고 믿겠는가. 믿고 보니 알게 된다는 것이다.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은 하루에 서너 너댓시간만 자며 연구했다.

부인에게 묻는다. 당신 남편이 그리 생활하며 어찌 건강을 유지하는가 하니 서너댓시간 자도 깊이, 달게 잔다고 말한다. 연구하는 모습도 흥미있고 재미있게 하여 지치지 않고 과로하지 않고 피로에 빠지지 않는다. 공부도 자원하면 지치지 않는데 부담감을 가지면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중국 말중에 권토중래란 말이 있다.

항우 장사가 8년간 전쟁하며 한번도 진 적이 없다. 그러나 별 힘없는 유방의 군대에게 패전한다. 그리하여 31살에 스스로 자살한다. 후세 사람들이 안타까운 마음인데 후세에 당나라 시인 "두목"의 "고광정"에서 이기고 지는 것도 흔한 일인데 재기해야 할 일인데 흙이 무너지만 다시 세우면 될 일인데 하며 안타까워하는 시를 지었다.

높은데도 거할 줄 알고 낮은데도 거할 줄 알았다는 사도 바울로 인해 온세계에 복음이 전해졌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잘 믿는 사람이 그러하다. 힘들고 고통스런 인생일지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

 

본문의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한다.

세계에서 성공한 200명에게 묻는다. 어렸을 때부터 목표를 가진 사람은 10%밖에 안되었다. 나머지 180여명은 진실한 믿음으로 살았다. 자세가 바르면 짐이 가볍지만 자세가 어긋나면 짐이 무겁다. 사람 삶이 그러하다.

 

전설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구해놓고 제자들에게 지고 올라 오라 지시하시고는 산언덕을 올라 가신다.

강골, 약골 모두에게 지었으나 누구는 감사하는데 누구는 불평한다. 쓸데없는 일을 시키신다고 불평한다. 한참후에 예수님앞에 이르니  십자가의 무게는 동일하지만 사람마다 마음가짐에 따라 달리 느낀다고 말씀한다.

 

민수기 22:28~32에서 선지자 발람을 태운 나귀는 평생 선지자를 모시고 다니는데, 발락왕이 이스라엘 저주를 위해 발람을  초청한다. 이에 발람이 나서는데 나귀가 좁은 길을 가다가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를 못봤지만 나귀가 보고는 밭으로 튄다. 발람을 떨어지게 하니 나귀를 매로 때린다. 나귀가 왜 때리느냐, 지금껏 당신을 순종했는데 지금껏 반항한 적이 있느냐 하니 이때 발람의 영안이 열려 여호와의 사자를 본다. 미물인 나귀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우리 인생의 짐을 지고가는 우리의 삶이다.

예수님의 멍에는 목자된 멍에이지만 쉽고 가볍다 하신다. 이는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쉽고 가벼운 믿음의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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