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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조원형목사님

140420 부활을 가져 오신 분

부활을 가져 오신 분

140420                                                                                                   조원형목사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20~24)

 

바다에서 참사당한 분들을 위한 기도를 하자.

 

온 세상이 배 침몰 책임을 묻고 있지만 그들에게 돌을 던질 자 누구겠는가.

그 선장이 목사이고 장로이며 권사이고 한국의 지도자들이다.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다 죽였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도 이 시대에 양심가가 있다.

아이들과 함께 나온 교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양심은 살아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잘못이지만 교감과 또 승무원 박지영 빈소에도 다녀왔다. 우리가 이 시대에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계기로 삼아야 한다.

또 죽음에 대하여 우리가 새롭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장자옥의 "마지막 남은 생명"이란 책 내용이다.

군 형무소에 두 사람이 있다. 전쟁중 민간인에게 총을 쏴서 사형 언도를 받은 사람과 또 한 사람은 월남전에서 동료를 쏴 죽여 사형 언도를 받은 사람이다. 월남전에서 동료를 죽인 이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소원이 무엇인가 물으니 고기를 실컷 먹고 싶다고 한다. 옆 사람이 방법이 있다고 알려준다. 네 몸을 실험용으로 팔아라. 죽으면 알겠는가. 그 돈으로 고기 사먹고 죽으라 한다. 그 몸값이 10만원이다. 결국 고기를 사서 먹는다. 동료들이 보기에도 원풀이하듯 먹는다. 맛있는가 물으니 내 몸뚱아리 먹는건데 무슨 맛? 한다. 결국 3만원어치밖에 못먹고 결국 총살 당한다.

(예수 믿는 우리조차도 죽음을 앞두고는 먹고싶은 것 먹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보고 싶은 것 보고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죽음을 앞두고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아이들을 헤쳐나와 승무원과 함께 목숨을 건진 우리들이다. 자신이 죽는다는 것은 잊어버린다. 죽을 때까지 건강해야 한다는 목적만 가지고 산다.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 영생은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이 사람의 죽음을 모든 사람들이 모두 봤다.

민간인을 죽인 사형수는 곰곰히 생각한다. 굶어 죽으면 어떻고 원풀이하듯 먹고 죽으면 어떠한가? 수중에 만오천원 남은 것을 좋은데 쓰자 하여 성가대가 위로차 감옥에 와서 찬양을 부르는데 적지만 이 돈 만오천원을 소중한데 써달라고 헌금한다. 군형무소 입당 예배 드리는 날이 그 이튿날이었다. 이 강대상이 사형수가 보낸 돈에 보태서 사왔다고 강론한다. 그 얘기가 군 형무소에 알려져서 법무부에 알려지고 결국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죽음의 의미를 모르면 부활은 망상이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저서 "두려움"에서 죽음은 필연성을 말한다. 그러나 사람은 잊어버린다. 피하려 하고 늦추려 하고 망각하고 산다.

왜 죽음에 대하여 마음을 빼앗기는가 하루라도 편하게 살자 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한국 교회는 지금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선악과에 마음 빼앗겨 살고 있다.

오래 살아도 끝은 온다.

 

중국 진시황이 그 예이다.

중국을 최초로 천하통일한 사람이지만 보다 더 오래 살려는 상징으로  기억한다. 장양왕의 아들로서 13살때에 왕이 된다. 하지만 실지 모사꾼 여불의 아들로서 왕을 속이고 자신의 부인을 왕에게 헌납하여 왕의 부인으로 삼아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다. 나라를 굳건히 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만리장성을 쌓다가 3대가 끌려가 죽은 집도 많았다. 3천동녀를 모집하여 환락에 빠진다. "사시"라는 사람을 불러 불로초를 구하게 한다. 신선술, 도술하는 사람을 불러 배우지만 돈만 받고 도망간다. "사시"라는 사람은 오질 않고 충언하는 선비들을 생매장하고 책을 불태운 사건이 분서갱유이다. 결국 서시라는 사람도 도망간다. 진시황은 결국 49살에 죽는다.

내 모습을 거기서 발견하지 못한다.

예수님이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죽음 때문이었다.

 

성경 본문 말씀이다.

죽음에 대하여 바른 신앙으로 증언하는 바울이다.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이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생각치 못한다. 하늘나라 가서도 금면류관을 쓰고 보화 쌓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최상의 영광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금면류관이라 표현한다. 실지 무거운 금관을 쓰고 냉장고 TV 세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정 때 이상재 장로가 있었다.

독립 운동하다가 감옥에 자주 갔다. 맨 처음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대화할 상대가 없어서 감옥에서 돌 틈새에 있는 종이의 성경구절을 보고 신앙 생활을 시작했다. 한번은 기자와 경찰이 회유하러 왔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백년 가까이 살아야 하고 존경받으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다. 결국 자기네들 말을 듣고 독립운동을 포기하면 여생을 평안히 살게 해 주겠노라 한다. 이에 호통을 친다. 내가 왜 죽어. 나는 영원히 산다.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고 하며 쫒아냈다.

 

나는 영원히 산다는 믿음이면 추하게 살지 않는다.

성경 말씀에서 부활과 변화는 희랍어로 동의어이다. 생명의 변화, 생명의 부활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1:25~26에서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한다.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않으면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 수 없다.

 

가인은 죽이는 자의 대표이고 아벨은 죽는 자의 대표이며 셋은 다시 사는 자의 대표이다.

이 시대에 누구를 비판하기 보다 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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