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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저곳

170408 행주산성에서

여의도에서는 벚꽃 축제가 한창이라지만 다음 주중에야 만개할 것이랍니다. 다음주에는 강화 고려산 진달래  축제도 한다네요. 현재 80%정도가 만개했답니다.

어느 곳에는 오늘도 개나리 축제가 열리고, 저지대 양지쪽엔 벚꽃이 피었지만 높은 지대는 조금더 기다려야겠네요.

하긴, 민들레 꽃이 한창이지만 벌써 홀씨를 날릴 준비가 완료된 곳도 있습니다. 양지바른 벽제관터 공원의 민들레입니다.

사진을 확대해 보면 홀씨가 여행을 준비하던 옛날 달떴던 내 마음속을 들여다 보는 것 같습니다만 지금은 동네 길가의 풀꽃만으로도 싱그러운 마음입니다.

다시 행주산성으로 올라 그 동안 보기 힘들었던, 흔하디흔한 제비꽃을 지천으로 봅니다.

민들레 홀씨는 낮고 햇살좋은 평지에서 보았지만 제비꽃은 행주산성 높은 곳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이 앞서네요.

따스한 봄날을 맞아 흔하디흔하다고 말하는 제비꽃이 내 눈엔 정겨워보입니다.

노란색 애기똥풀 꽃도 보입니다.

물론, 행주산성에도 개나리, 진달래 꽃잎뿐 아니라 홍매화꽃잎도 바람에 휘날리며 떨어지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만 행주대첩비 앞의 살구나무는 양지쪽만 피었고 꽃몽오리가 생긴 상태입니다. 벚꽃이 피려면 일주 지나서 보름정도는 더 기다려야 할 정도로 꽃몽오리가 생기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물론 낮은 곳은 벚꽃도 한창 많이 피었지요.

행주산성에서의 이야깁니다.

이제 정확히 만20개월된 손주와 함께 나왔습니다만 하늘이 황사로 인해 누렇게 보이는 날씨인데다가 행주산성이 어떤 역사를 지녔는지 정확히 알아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여인들이 행주치마로 돌을 실어나르면 민군들이 왜군에게 던져 물리쳤다는게 아니겠는가 짐작하면서도 명판에 새겨진 글씨를 읽어보니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긴 명판의 글을 읽기에는 시간 낭비가 아닌가 하지만 손주와 함께 하는 이 시간이 행복의 시간이라 생각되기에 긴 글도 쉼없이 읽어내립니다. 행주대첩비 계단은 물론 뒷편 토성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을 오르내리다보니 귀가하여 밤에 잠을 자려니 20개월 손주가 다리가 아팠던 모양입니다. 다리를 주물러주니 시원해져서 잠이 들었다는 말도 듣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은 전쟁에 익숙한 자들로서 조총이라 하는 새 무기를 가졌으며 우리나라 군대는 2백년동안 평화스러운 생활을 하던 농민군으로서 무기다운 무기도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싸움은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다. 부산 동래 상주 충주가 연달아 함락되고 정부가 의주로 피난하였으며 전라도와 평안도의 일부를 제외한 전국 방방곡곡이 왜군에게 유린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적의 수군을 전멸시키고 육지에서는 권률장군이 행주대첩을 얻어 차차 전세를 우리에게 유리하게 인도하였다. 권률장군은 본래 문신이었으나 장수의 자질을 겸했기 때문에 1592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의 특명으로 전라도 광주 목사가 되었으며 7월에 왜군이 금산으로부터 전주로 쳐들어올 때 이치(梨峙)에서 이것을 막아내어 적으로 하여금 전라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8월엔 전라 감사로 승진하였으며 9월에 근왕병 4천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올라가 강화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12월에 진지를 수원 독성으로 옮겨 때때로 왜병을 공격하면서 명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159318일에 명장 이여송이 4만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평양을 수복하였으나 27일 벽제관 싸움에서 패하여 개성으로 후퇴한 뒤 다시 전진하지 아니하므로 권률장군을 명군과 연락하여 서울을 수복할 목적으로 211일에 조방장 조경승장 처영과 함께 정병 23백명을 거느리고 양천으로부터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들어와 토성을 쌓고 목책을 치고 있었다. 이 때 서울에는 평안도 황해도로부터 후퇴한 왜병이 집결하고 있었는데 12일 새벽에 왜병 우끼타히데이에가 3만 대병을 총동원하여 행주산성을 포위하고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서로 교대하여가면서 공격해 왔으나 워낙 산성이 높고 가파르며 아군이 고지대에서 활과 총통을 쏘고 돌을 던졌기 때문에 쉽게 쳐올라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두울 무렵에 악착같이 달려들어서 북쪽 자성의 목책 한칸을 파괴하고 쳐들어왔으며 그곳을 지키던 승군이 조금 물러서려고 하므로 그 찰나 권률장군이 칼을 들어 물러선 자 두어사람을 죽이고 독전하여 마지아니하였다. 이에 전군이 죽음을 무릎쓰고 적과 싸워 마침내 이를 물리치고 다시 목책을 세웠다. 이 싸움은 23백의 작은 군대로써 3만의 적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이 물러갈 때 시체 네 무더기를 불사르고 갔는데 아군이 적의 시체를 주은 것이 13십이오 기치와 창검을 얻은 것이 또한 많다 하니 실로 큰 전과이며 이 싸움으로 인하여 아군과 명군의 사기가 일어나 차차 적을 남으로 쫓고 정부가 환도하게 되었으니 그 의의는 실로 크다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싸움을 임진왜람의 3대첩의 하나로 손꼽으며 권률장군은 그 동으로 도원수가 되어 우리나라 육군을 총지휘하였고 전쟁이 끝난 뒤 선무 1등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장군이 돌아가신 뒤에 행주대첩비를 건립하고 산 밑에 기공사를 세워 장군의 영령을 봉인하였으나 그 동안 모두 황폐하여 볼 모양이 없으므로 금번 박정희 대통령의 분부를 받들어 문화공보부가 행주성지를 정화하고 권률장군의 사당을 새로 지어 장군의 영정을 봉안하고 비각과 정자를 지어 장군과 부하장병 및 구국의 결전에 참여한 백성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널리 선양하여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나라를 스스로 지키는 자주의 정신을 길이 계승하고자 한다. 이 비는 1963815일 당시 재건 국민운동 경기도지부가 세웠던 것인데 비문에 훼손이 심하여 다시 새기어 세우는 것이다. 큰 글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쓰고 비문은 신석호가 짓고 글씨는 서희환이 쓰다.

197011월 일

 

왼쪽 사진은 작년4월2일 손주가 8개월이 채 안되었을 때의 사진이고 오늘 4월8일에는 작년보다도 개화가 늦은 상태에서도 20개월 손주가 웃어제끼는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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