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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주승중목사님

180204 전부를 넣었느니라

전부를 넣었느니라


180204                         주승중목사님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2:41~44)


오늘은 봉헌에 관한 설교이다.

교회에서 돈 얘기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르게 말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칼빈은 말한다. 물질에 대한 청지기 직을 잘 감당하자.


어린아이에게 동전 두개를 준다.

한개는 헌금하고 한개는 사먹으라 한다. 교회를 가는 도중에 유혹에 넘어갈까 염려함이다. 그런데 아이가 교회를 가다가 실수하여 한개를 떨어뜨려 수채구멍에 빠진다. 이에 하나님께 드리는 동전이 하수구에 들어갔다고 아이가 말한다. 봉헌의 태도이다.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의 이야기이다.

성전 입구 여인들의 뜰에서 놋쇠로 된 헌금함 앞에서 예수님이 지켜보신다. 헌금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제자들을 부르시고 교육시키시는 장면이다. 제자들을 불러 교육시키신 것이 이 장면이 유일하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이 물질에 우리의 마음이 담겨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봉헌을 보고 계시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계신 것이다. 헌금 당시에는 여러 부자들과 사람들이 있었다.

과부는 두 렙돈 즉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푼돈 즉 500원 내지 천원가치의 액수이며 당시 비둘기 한마리를 살 수 있는 액수였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보다도 많이 넣었다고 말씀한다. 평가 기준이 우리와 다르다.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동기와 자세를 보신 것이다.

우리의 동기와 자세는 어떠한가.


먼저,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신앙의 표현이다. 이 여인의 생활비 전부이다. 신학자들은 이 돈이 과부가 하루를 벌 수 있는 전부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시는 과부 여인이 돈벌기 어려운 시대였다. 그러면서도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내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홀로 남은 그녀에게서 자신의 생활비를 넣었다. 그 돈은 생계 유지에 필요한 물질이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실 것을 믿었기에 드린 것이다.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맡기는 행동이었다.

봉헌도 신앙고백의 행위이다. 생활이 안정되고 돈을 많이 벌면 헌금하겠다지만 믿음이 없으면 더 튼 위험에 빠진다.


미국 한 사업가가 사업에 대한 십일조를 하겠다면서 목사님께 기도해 달라 한다.

그리하여 사업도 번창한다. 천달러일 때 백달러 헌금운 쉬웠지만 백만달러 수업에 십만달러 헌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6백만 달러를 벌 때 60만달러가 아까워 교회를 떠난다. 이에 양심이 찔려 목사님께 십일조가 아니라 백에일조를 드리면 어떻겠느냐 기도해 달라 하니 십일조는 변할 수 없으니 다시 천달러 수입이 되기를 기도한다고 말한다.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인데 우리의 믿음의 고백인데 드리는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신뢰 문제이다. 하나님보다는 통장 잔고를 신뢰하는 것이 아닌가.


둘째는, 봉헌은 커다란 희생을 말한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 드렸기에 희생이 없었다. 그러나 과부의 희생이 있었기에 봉헌의 진수이다. 봉헌은 희생이다. 기꺼이 드릴 수 있어야 하는데 꺼리는 이유가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희생의 댓가를 거부하고 값싼 은혜를 촉구한다.


다윗이 아라우나 타작 마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싶었다. 당시 타작 마당은 바람부는 높은데 위치하여 경관이 좋았다. 아라우나가 그걸 알고 자신의 것을 드리겠다고 말하지만 다윗은 은 오십세겔을 주고 사서 제사를 드린다. 값없이는 제사드리지 않겠다 한다.

마게도냐 사람들도 환난의 시련 가운데서도 풍성한 헌금을 했다. 힘에 지나도록 자원했다고 사도 바울이 말한다.

액수 얼마를 바쳤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희생을 얼마나 바쳤는가가 문제이다.


십일조는 가장 대표적이고 기본이 되는 헌금이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말한다. 주께서 주신 것을 주께 드리는 것이다. 십일조를 드림으로서 전체를 드린 것으로 인정하신 것이다. 최소의 기본 봉헌이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던 역사가 있는 십일조이다. 멜기세덱에게 살렘왕이 드렸던 역사가 있다.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이것이 십일조의 시작이다.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드리고 자랑할 때에 책망하신 것은 겸손과 십일조 이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십일조는 의무가 아니다. 신앙고백이요 믿음의 행위이다.

십일조를 제대로 하여 교회 각부서가 마음껏 활동하길 바란다. 선교도 왕성하길 바란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헌금을 강요하면 중세시대 면죄부를 파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봉헌은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믿음과 희생으로 봉헌하여야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