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시나이다
181216 조원형목사님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편 139:1~10)
서양인 슈바이쳐 아인스타인 등의 이름을 가진 이들이 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선교사로서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일했다. 자유신학을 가졌다. 그 자유주의신학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아인스타인은 과학자이다. 우주를 연구하며 신학자보다도 더 공감되는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에 겸손한 자로 생애를 마감하는가, 교만한 자로 마감하는가. 아인스타인은 우주에 대해 연구할수록 지식을 더해갈수록 신비가 더해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반인이 알수록 신비가 깨어진다는 것은 교만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더 신비하다고 말하는 그는 신앙이 있든없든 겸손하다. 교만한 이는 뭘 하나 이뤄놓고는 우쭐하며 착각한다.
유명 외과의사 한분에게 기자가 질문한다.
매일 사람을 수술하다보니까 사람이 마치 동물의 살과 뼈처럼 하찮게 생각되지 않는가 하니 아니라 한다. 사람의 몸은 신비롭다고 말한다. 의학적으로는 전혀 살릴 가능이 없고 마지막으로 수술로 시도나 해보자 하지만 살아난다. 상상외로 수술직후 또는 몇개월 내로 죽는 줄로 알았는데 생명이 살아난다. 신비롭다 한다.
처음 교회에 나오면 신이 계신 곳, 천사들이 모인 곳, 신비한 세계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허물도 알고 약점도 알지만 늘 신비롭다는 이가 겸손하다. 교회가 어떤 곳인지 다 안다고 하는 이는 잘못하면 양심을 화인맞아 불량배 노릇을 한다.
사울왕과 다윗왕의 차이가 겸손이다.
사울이 다윗보다는 더 도덕적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말씀을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준 이는 다윗이다.
교회가 예배하고 섬기는 곳이고 세상에서는 내노라 하며 살지만 교회에서는 생명이 있음에 감사하는 이가 겸손하다.
우주 과학 세계만 신비한 것이 아니다. 우주 천체에 블랙홀이 있다. 그러나 현대 과학으로는 알 수가 없다. 거대한 별이라도 가까이 가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블랙홀을 지옥이라 하지만 개념이 다르다.(천국과 지옥은 영적인 세계이다.)
신비는 시간 속에도 있다.
우리는 현재 존재하는가. 과거에도 존재했고 미래에도 존재한다.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이고 미래의 나이다. 미래의 나가 과거의 나이다. 복잡한 개념의 신비이다.
1965년 불란스의 콜 모스키 교수가 사람의 뇌는 두개가 있다고 말한다.
좌뇌는 계산하고 우뇌는 정서 통합적 기능이 있다고 발표한다. 두개의 뇌가 기능이 다르다. 세번째 뇌는 영적인 기능이 있다. 우리의 영혼이 머리에 있는가, 가슴에 있는가. 아직은 모른다. 양파같이 벗길수록 신비롭다.
신비의 세계를 알아가는 주체는 무엇인가.
농사 과학 의학 시간 등에 대해 신신학자 칼버트는 그 주체가 하나님이라 한다. 이 세계를 알아가도록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 말한다. 과학자 의학자 수학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다. 모르는 사람이 교만하여 교회의 권위도 짓밟는다. 나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교만하면 퇴보한다. 겸손한 자가 진보한다.
캄캄할수록 자신을 낮추고 거하면 길을 발견하고 깨닫는다. 말씀도 주석까지 다 읽었다고 하지만 겸손한 자는 말씀 하나로 묵상한다.
욥이 공경하고 충성했는데도 하루 아침에 자식 잃고 재산 잃고 길거리에 나앉아 가려운 피부병을 기와장으로 긁는다. 처음엔 왜 나를 모르십니까 하지만 고난을 겪으며 주께서 나를 아시나이다 겸손의 단계로 내려간다. 38장에서 책망받고 겸손의 자리에서 회복한다.
본문에서 다윗도 주께서 나를 아시나이다 고백한다. 자기 자신이 자기자신을 안다고 하지만 어머니만큼 자기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나를 아시나이다 고백한다. 창세기 4:1에서 아담이 하와와 동침한다는 말은 히브리 말로 안다는 뜻이다. 문맥상 똑같은 단어라도 하늘과 땅 차이의 해석을 한다.안다는 것을 성적인 관계로 하와와 뱀이 성적인 관계로 해석하는 것이 이단이다. 단어의 의미를 똑같은 단어라도 해석을 잘 해야 한다. 지식인들이 이단에 잘 넘어가는 이유이다.
주께서 나를 아시나이다 고백하는 다윗의 아시나이다는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욥의 아시나이다는 나의 충성과 성품과 처지를 아신다는 뜻이다.
30~40대에는 충성 원리 원칙을 설교했다. 지금은 은혜 감사 긍휼 용서를 설교한다. 세월이 지날수록 감사하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평하고 잘못을 지적할수록 교만에 머물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은 일본식 발음이다) 칼뱅(칼빈)은 젊었을 때 막 살았으나 후엔 성자가 되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 말한다. 부모가 자식이 잘못하는 것을 알고도 지켜보듯이 성숙하도록 나를 키우고 계시다는 것이다.
대표기도도 예배를 위한 기도만을 하자.
고백과 감사에 대한 기도만 하자.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한 기도는 따로 하자. 교회와 사회에 대한 불만은 교회에서 대표할 기도가 아니다. 옛날 바리새인이 기도할 때와 다를 바 없다.
"예수님의 터치"라는 책에 나온다.
경매장에 낡은 바이올린이 나왔다. 아무도 안산다. 3불까지 내려간다. 웬 노인이 나와서 바이올린을 켠다. 감동을 받고 3천불까지 올라가 판매되었다.
고물로 버려야 할 물건이 예수님 손에 잡혀 겸손한 자로 살 때 무궁무진한 신비한 자로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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